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교육/문화 기획/특집

육문 스님, “상생의 길에 화합으로 동참하겠다”

admin 기자 입력 2019.12.04 22:17 수정 2019.12.04 10:17

전국 비구니회 회장 퇴임…소임마치고 아름다운 회향

↑↑ 군위 법주사 육문 스님
ⓒ N군위신문
“전국비구니회 화합을 위해 작지만 힘을 보탰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전국비구니회 제11대 회장 육문스님이 4년 임기를 마치고 아름다운 회향했다.

지난 2015년 11월 13일 전국비구니회 제11대 회장에 취임한 육문스님은 당시 열린비구니모임과 전국비구니회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던 상황에서 ‘화합’을 강조하며 임기 내내 비구니승가의 확고한 위상을 정립과 청정승가 전통 계승을 위해 노력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화합하면서 지혜롭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육문스님은 제12대 전국비구니회장 본각스님 취임법회를 앞둔 지난 11월 11일 중앙종회의원에 성명서를 제출, 비구니 승가 화합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성명서에는 “현재 우리 사회는 세대간 갈등, 지역과 정쟁의 반목, 진영의 분열을 화합과 화쟁으로 이끌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며 “우리도 화합과 소통을 통해 비구니승가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또한 그것을 바탕삼아 날마다 향상 일로하는 제12대 집행부에 매우 큰 기대를 갖는다”고 12대 집행부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육문 스님은 덧붙여 “본각 스님은 당선 직후 일성으로 ‘모두가 함께하는 너른 바다가 되자’고 강조하였다”며 “‘변화’와 ‘소통’의 슬로건은 전국비구니스님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며 저희들도 상생의 길에 화합으로 동참하겠다”고 협력을 다짐했다.

“돌이켜 보면 서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을 불필요한 갈등에 사로잡히게 하였고, 화해할 수 있었던 것들을 대중들 상호간에 반목하게 한 것은 지혜가 없고 부덕한 소치라 생각한다”며 선거과정에서 불거진 불미스런 일들에 대한 소회를 밝힌 육문스님은 “이제 관용과 용서의 갈림길이란 선착장에서 자비의 바다로 함께 항해해 나갈 시간”이라며 “비구니승가에 ‘변화’ 와 ‘소통’을 크게 기대하며, 현재 불교계의 시대적 화두인‘출가자와 신도는 갈수록 줄고 있고, 대내외적으로 떨어진 신뢰도를 어떻게 회복하느냐’라는 시급한 당면과제 해결에 앞장서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의 말을 남겼다.

<오직 세세생생 불제자 발원-다시 태어나도 수행자 될 것>

1946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한 육문스님은 17세에 출가했다. 스님이 열여섯 살 때 다섯 살이었던 조카가 죽음을 보고 나서 무상함을 느껴 출가했다.
↑↑ 왕맷돌
ⓒ N군위신문

육문스님은 한 번도 출가를 후회해 본 적이 없다면서 “무슨 복이 있어 부처님 제자가 됐는지 감사할 뿐이다. 지금도 부처님 앞에 서면 ‘세세생생 태어나도 부처님 법 여의지 않게 해주시고 부처님 정법을 만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고 발원한다고 밝혔다.

어려서부터 어른 스님들이 원을 물어보면 ‘평생 중노릇 잘하게 해주시고 평생 불퇴전입니다’는 대답뿐이었다.

1969년 팔공산 양진암에서 처음 방부를 올린 이후 25안거를 성만한 육문스님은 납자로 대중의 표상이 되어 왔다. 선원에서 3년간 몸을 눕히지 않고 정진하는 장좌불와도 하고, 일체 말을 하지 않는 묵언(默言) 수행을 한 수행자이다.

“참선할 때 말을 자꾸 하면 아무래도 손해가 많다”고 회고한 육문스님은 고담화상(古潭和尙)의 법어 가운데 한 구절을 들려주며 불제자들의 정진을 당부했다.
ⓒ N군위신문

“약욕참선(若欲參禪) 불용다언(不用多言) 조주무자(趙州無字) 염염상련(念念相連), 만약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조주무자를 놓지 않고 계속 공부해야 성불할 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난 뒤에는 되도록 대중과 어울리지 않고 정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평생 수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육문스님은 “어느 누군들 수행자가 그렇게 살지 않았겠냐”면서 “옛날 어른들이 평생 수행의 길을 걸었듯이, 저 역시 남과 똑같이 부처님 법(法)을 어기지 않고 살려고 노력했다”고 수행자의 삶을 겸손하게 전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일도양단(一刀兩斷)’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결단’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래야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런 자세를 가져야 부처나 조사가 되지는 못해도 부처님이 가신 길만이라도 금생에 알 수 있지요.”

육문스님은 “스님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수행하고 정진해야 한다”면서 “우리 스님들이 부처님 법을 지키며 잘 살 때 모든 사람이 스님을 존경하고, 따라온다”고 강조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 N군위신문

육문스님이 평소 즐겨 암송하는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다. 뜻을 해석하면 “눈 온 들길을 걷는 사람이여, 갈팡질팡 걷지 마라, 오늘 그대의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니라.” 스님의 평소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육문스님은 세파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남(指南)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늘에서 똑같이 비가 내리는데, 초목은 크고 작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의 모든 업은 수행자의 책임입니다. 열심히 잘 사는 사람에게 길이 있지만, 지금 당장 편하려 하면 길이 없습니다. 자기 힘을 다해서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스님은 “천리일보(千里一步),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지 않습니까. 한 발짝 두 발짝 내딛다 보면 이뤄지는 것입니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가까운 것부터 한 발짝 씩 내 디뎌 보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어요. 자기 의지를 고양해서 되도록 이면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사찰을 비구니들의 수행도량으로 탈바꿈>

육문스님은 다 쓰러져 가는 전각 하나만 있던 법주사를 선원까지 있는 번듯한 도량으로 가꿨다.

법주사는 경북 군위군 소보면 청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 N군위신문

실제로 법주사하면 충북 보은면에 자리한 속리산 법주사를 떠올리곤 한다. 속리산 법주사는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창 삼창을 거듭하며 뛰어난 고승대덕들을 배출해낸 큰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명의 법주사와는 달리 군위의 법주사는 그 규모나 역사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찰이 멸실과 존폐의 역사를 거듭해 온 사실을 감안한다면 군위의 법주사는 불맥을 면면히 이어온 사찰 축에 든다. 그것은 법주사에 남아 있는 여러 정황을 미루어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소지왕때 심지왕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군위의 법주사가 얼마나 사세가 대단했는지는 먼저 왕맷돌을 통해 짐작할 수 있겠다.

군위법주사왕맷돌(軍威法住寺왕맷돌·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2호)은 위·아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맷돌로 알려져 있다.
ⓒ N군위신문

맷돌이란 정성스레 다듬은 2개의 돌을 아래·위로 포개어 놓고, 위의 돌을 회전시킴으로써 곡물을 갈게 되는 것으로, 윗돌에는 곡물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랫돌에도 곡물을 잘 갈리게 하기 위한 홈이나 구멍을 두는데, 이 왕맷돌은 모두 4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찰에서 남쪽으로 200m 쯤 떨어진 곳에 반쯤 묻혀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원래는 스님들이 기거하던 요사채 가까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하게 생긴 맷돌이 카자흐공화국 알마아타박물관, 우즈베크공화국 브라하박물관 등에도 전시되고 있어, 고대부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법주사오층석탑(法住寺五層石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은 법주사내의 보광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는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위층 기단과 탑신의 4층 몸돌·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이상의 몸돌은 크기가 거의 줄지 않았다. 1·2·3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 남쪽면에는 문모양과 글씨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깊이 패이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가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5층만은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의 곡선도 밋밋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얹어 놓았다.
ⓒ N군위신문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일부 석재를 잃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또 군위 법주사 괘불도(軍威 法住寺 掛佛圖·보물 제2005호)는 1714년(숙종 40) 수화승 두초를 비롯하여 변철, 치겸, 심안 등 9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완성한 괘불이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 괘불도는 1714년 5월 15일 제작을 마치고 경상북도 군위군 청화산(靑華山) 법주사에 봉안되었다고 하여 정확한 조성시기와 봉안처를 알 수 있다.

총 16폭의 비단을 이어 만든 10m에 달하는 장대한 화면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을 좌우로 벌려 연꽃을 들고 있는 입상의 보살형 여래가 화면에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노사나불(盧舍那佛) 수인(手印)을 하였으나 보관과 장신구로 화려하게 장엄한 보살의 모습으로 주존(主尊)을 표현한 점, 화면 하단에 용왕(龍王)과 용녀(龍女)를 협시처럼 배치한 점, 본존불 광배 좌우에 1불상 및 1보살상을 그린 구도 등 다른 괘불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화면 구성을 시도한 것이 주목된다.

담채기법의 색감과 세밀하고 정교한 필선, 다양한 문양 등이 어우러져 작품의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보관을 쓰고 연꽃을 들고 있는 주존불의 모습은 조선 후기 불화의 새로운 도상(圖像)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 N군위신문

법주사 보광명전(寶光明殿·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5호)은 1690년(康熙30年, 辛未)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불전은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고주를 2개씩 세우고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진고주를 두어 후불벽을 설치했고, 내진고주는 측면 뒤쪽 기둥 열 보다 2자 반 정도 뒤로 물러나 있다. 가구는 5량가로 반자는 층단으로 구성한 우물반자로 꾸며 화려한 단청을 시채하고, 어칸과 주변 한단 낮은 반자에는 문양을 달리 하여 어칸을 강조하였다.

법주사 보광명전의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어려우나 후불단의 기둥 위치, 배면 창호모습, 전면 창호의 흔적모습, 공포의 형태, 퇴량 마구리의 치목수법 등을 볼 때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건축학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

육문스님은 2001년 보광명전을 새로 건립하고, 2003년 명부전과 산신각을 세웠다. 법주사는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3길 215에 있다.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