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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늙은이의 눈물

admin 기자 입력 2020.03.02 15:22 수정 2020.03.02 03:22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세상이 요동친다.
봉준호의 ‘기생충’(parasite), 방탄소년단의 현란한 끼와 노래, 류현진 투수의 멋진 폼, 손흥민의 100m 질주 골인 장면은 전 세계인들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옥의 티랄까 ‘늙은이의 눈물’ 작가 이름이 빠져있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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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년(更子年) 2월 8일. 내 나이 갓 산수(傘壽)에 노인회장이란 영광스러운 감투를 쓰게 되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장(長)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세상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더 없이 귀중하고 소중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호하며 축하해 주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팬 늙은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정월 보름 마을 대동회가 열리는 날이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던 날씨가 약간 쌀쌀하다. 대동회 참석을 독려하는 이장님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동네에 울려 퍼진다. 늙은이는 아무리 치장해도 몸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향기는 어쩔 수 없다. 나름대로 옷을 차려입고 서둘러 30분에 전에 도착했다.

회관에는 아무도 없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누가 보일러를 켜 두었든지 회관 안은 훈훈하다. 혼자 앉아있으려니 멋쩍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넓은 회관이 꽉 차고 일부는 서 있었다. 동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했으나 오늘만큼 많은 사람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총무가 지금부터 2019년 동부2리 마을 대동회를 개회하겠습니다. 식순에 따라 이장 인사, 감사보고를 하고 총무가 수입지출 내용을 적은 보고서를 돌린 후 읽어 내려간다. 다 읽고 난 다음 모르는 점이나 궁금한 것 있으면 질문해 주십시오. 전원이 이의가 없다고 하자 대동회는 성황리에 마쳤다.

이어서 총무는 노인회 결산보고를 하였다. 자조금과 군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사용한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궁금한 것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했다. 모두 없다고 하면서 박수를 쳤다.
이장이 회의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서 회의를 진행한다.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노인회장 임기가 2020년 2월 8일 오늘까지입니다.

그래서 다음 노인회장을 선출해야 합니다. 하면서 선출 방식을 묻는다. 한 사람이 일어서서 원래는 임시 의장단을 구성해서 새로운 회장단을 선출해야 하는데 이장이 회의를 진행하면서 노인회장을 선출하면 좋겠다고 동의안을 제출한다. 모두가 찬성했다.

이장이 한 사람 추천해 주십시오 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추천한다고 한다. 뜻밖의 내 이름 부르는 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좋다 하며 박수를 친다.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장이 당선되었음을 선포한다. 회장님께서 나오셔서 인사한 말씀해 주십시오 한다.

얼떨결에 노인회장이 된 나는 어쩔 수 없어 앞으로 나갔다. 많은 사람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따뜻하던 눈빛이 오늘따라 무서운 눈초리 같아 겁이 들썩 났다. 에둘러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문을 열었다.

새해가 지난 지 보름이 되었습니다.
늦었습니다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동네 주인은 바로 동민 여러분들입니다. 저는 한낱 머슴에 불과합니다.

주인이 시키시는 데로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세계는 지금 코로나 19(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19)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고서 인사를 마쳤다. “감투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런 것 같았다. 말 한마디 하는데 이렇게 이마에 진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이 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좋았다.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것보다 어려운 것 없다는데 동민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쳤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등교할 때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의 복장, 용모, 지각하는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 담임선생님에게 보고하는 주번이 있었다.

훈육 선생님은 붉은 줄이 세 개가 있는 완장을 팔에 끼고 주번은 줄이 두 개가 있는 완장을 끼었다. 완장을 끼고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주번이 멋있고 권력이 대단한 것 같아 보였다. 나도 인정받는 주번처럼 되어 권력을 피우고 으스대고 잘 난 척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주번이 내 차례 될 때까지는 졸업해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시제도가 있었다.

학교에서 중학교에 진학할 학생과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을 나누었다.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에게 주번을 시키고 진학하는 학생에게는 늦도록 공부를 시켰다. 나는 주번이 하고 싶어 진학을 포기했다.

그날부터 나는 주번이 되어 완장을 끼고 교문 앞에 서서 어슬렁거리며 지각 학생들의 이름을 적고 했다. 중학교 입학원서를 제출할 날짜가 다가왔다.
누나가 너는 입학원서를 내어야 하는데 왜 가지고 오지 않으냐 하며 묻는다. 주번이 하고 싶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고 했다.

누나는 화를 벌컥 내면서 “이 등신아! 중학교 안 가면 너는 바보가 되는 거다. 알겠나?” 내일 당장 완장을 담임선생님께 드리고 중학교 입학 원서 가지고 오라고 하며 야단쳤다. 높은 벼슬처럼 여기며 그토록 끼고 싶었던 완장을 한 달 채 못 끼고 벗어야 했다.
그때의 생각에 아직도 늙은이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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