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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1)

admin 기자 입력 2020.03.02 22:07 수정 2020.03.02 10:07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조선역사에서 여러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실제 있었던 일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일 경우도 많이 있다.

그 사건 중심의 역사에서 그 시대를 이끌어 갔던 군위와 인연을 맺은 두 인물이 있다. 단종의 시신을 함께 수습 하였던 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을 지냈던 정사종 이야기는 이전의 역사흐름을 먼저 알아야 두 충신의 인물평전을 깊게 이해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조의 왕위찬탈, 어린 단종의 비참한 죽음, 또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등 극적인 부분들은 세조의 쿠데타란 불법적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하였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세조의 쿠데타를 다루기 위해서는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세종의 세자 책봉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혈육 간의 죽음까지도 마다 하지 않았던 왕자의 난을 두 차례나 거치면서 왕위를 올랐던 아버지 태종의 험난한 삶과, 그리고 역시 맏아들이 아니었던 세종 자신도 세자가 되기까지 겪었던 극적인 과정, 이런 것들은 세종에게 자신의 대를 이을 다음 세자를 책봉하는 일에 강박관념 같은 의무감을 갖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동시에 적장자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의 원칙을 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태조 이후 세종까지 3명의 왕이 있었지만 적장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은 세종이 강박관념을 갖기에 충분한 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종은 즉위한지 3년 만에 맏아들인 문종(李珦이향)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30년이 되던 해 (1448)에는 문종의 맏아들인 단종(李弘 이홍위)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살아 있을 때 왕세손까지 미리 정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왕위계승을 보장하는 일에 이처럼 세종은 안타까우리만치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아들은 모두 18명 이었는데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모후 소헌왕후(昭憲王后)심씨 소생으로 여덟의 아들과 2명의 공주를 두었다. 맏아들인 세자 문종(李享이향)하면 유약하며 병약한 모습으로 드라마나 영화의 미디어 이미지로 많이 비추어졌지만 실제 문종의 이미지는 풍채가 당당하고 얼굴이 준수했으며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등 많은 문헌에 의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문종을 볼 때마다 외모를 극찬하며 사신이 세자를 대우 하기를 매우 공손히 하고 칭찬하기를 “이 나라는 산수가 빼어 나더니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나는 군요 하였다.(세종실록 7년 윤 7월 19일 기사 중에서) 문종의 수려한 외모와 호탕한 성품에 세종을 뛰어 넘는 학문적 천재성에 무예까지도 뛰어 넘었다고 한다.

특히 과학 분야에 관심을 보여 원래 장영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측우기를 제작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정사에 참여 했으며 세종 후반의 치세는 문종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문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둘째가 후일에 세조대왕이 되실 수양대군이다.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체력과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니고 일찍부터 정치적 야심도 있었다.

그에 상응 하는 재능도 지닌 다재다능한 잠룡(潛龍)이었다나고나 할까 표면에는 나서지 않으면서 물 밑에서 꿈틀거리는 그런 용이었던 거다. 다만 적장자 이며 엄친아 였던 문종에 가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왕자로 보였을 뿐이다.

세종은 일찍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수양대군 존재를 걱정 했다.

원래 수양대군은 진양대군이었다.
세종이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은 백이,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조카지만 성왕(成王)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周)주공(周公)처럼 되기를 바랐지만, 수양대군은 조카를 죽이면서 까지 군왕에 대한 권력의 욕망을 꺾을 수 없는 인물 이었다.

그래도 세자 문종은 한 달에 몇 번씩 반드시 여러 형제들을 번갈아 불러 우애의 정을 나누었고 여러 아우들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반드시 형님 되시는 세자궁에 달려와서 도움을 청하며 의논을 하였다.

하지만 열여덟 아우들 중에 가장 말썽꾸러기로 부왕(세종)에게 걱정을 듣는 이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두 분이었다. 수양은 호협(豪俠)하고 안평은 호방(豪放)하였다. 수양은 열네 살 즈음 남의 유부녀 방에서 자다가 본서방에게 들키어 뒷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십리를 달아났고, 열여섯 살적에 왕방산(王方山포천) 사냥에서 하루에 노루와 사슴을 수 십 마리를 쏘아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모두 피에 물들 정도였다.

이 모습을 늙은 무사 이영기 등이 보고는 오늘 태조대왕의 신무를 다시 보는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께서는 수양대군이 너무 날래고 날뛰는 것을 자르기 위하여 항상 소매 넓은 윗옷과 가랑이 넓은 바지를 입히시고 너같이 날랜 사람은 넓은 옷을 입어야 쓴다고 하며 경계하시었다.

셋째인 안평대군은 소절(小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주색을 즐겨하였으나 수양대군 같이 우락부락 왁살스러운 말썽꾼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무위(無爲)이니 나는 술이나 마시련다 하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안평대군에게도 숨길 수 없는 영웅의 기상이 있는 것은 물론 이었다.

풍채와 문장과 글씨, 그림, 가야금에 능했으며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리는 일세를 진동한 안평대군이시다. 호탕한 성격에 문인기질도 강하여 집현전 학사와 폭 넓은 교유를 맺었던 안평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넓혀 갔고 주변에는 수양대군 보다 그를 따르는 이가 많았고, 식객들 또한 많았기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라이벌 싸움에서 안평대군의 승리로 이어질 것이라 어겼지만 수양대군은 확실한 기회가 올 때까지 몸을 낮추고 기다려 수양대군이 승리하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고 한다.

세종은 수양과 안평이 모두 정치적 야심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염려한 되로 안평대군은 강화도 유배지인 교동도에서 수양대군에 의해 사사 당하고 만다.

소헌왕후의 여섯째아들인 금성대군은 사리에 밝으며 의리가 있고 활달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단종 폐위 이후 순흥부에 이배 되었다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지만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과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나이가 32세 였다고 전해진다.

안평대군 바로 아래 동생인 임영대군은 수양대군을 크게 도와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데 일조하였던 인물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은 학문에 조예가 깊었지만 20세 나이로 요절하였고, 일곱 번째 평원대군은 성품이 겸손하고 효행과 우애가 있어서 세종의 아낌을 받았지만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막내인 여덟 번째 영응대군도 글씨, 그림, 음악, 등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세종대왕이 37세 소헌왕후의 나이 38살에 낳은 늦둥이였다. 세종은 막내아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세상을 떠날 정도이니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소헌왕후 심씨 소생의 대군들 모두 영민하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그러므로 나이 어린 단종을 왕세손으로 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 일어날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문종의 건강 악화에는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연이어 1450년 세종이 훙(薨) 하여 다시 삼년상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문종이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다 해도 총 6년의 상주노릇을 이어 한다는 것은 쇠약 해 질만한 상항이었다. 결국 문종은 종기를 앓다가 재위 2년 3개월 만인 1452년에 병사 하였다. 삼년상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안동에서 어느 상주가 상복 차림으로 개고기를 먹고 있는 것을 마침 지나가던 퇴계 이황의 제자가 보고 쪼르르 달려가 스승에게 “선생님, 제가 길에서 개고기를 먹는 상주를 봤는데 아주 불효 막심한 놈입니다”라고 일러 바쳤는데 퇴계는 “이 멍청한 놈아 그건 삼년상을 치른다.

고 버티다 몸 버리고 병나면 그게 더 큰 불효 아니냐”라며 오히려 제자를 나무랐다고 한다. 퇴계이황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지만 원칙을 중시하다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을 굉장히 경계하던 분이라 가능했던 답변이다.(다음호)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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