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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본 사헌부 수난사

admin 기자 입력 2020.03.02 22:08 수정 2020.03.02 10:08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사헌부(司憲府)는 조선시대 검찰이다.
정치에 관하여 논의하고, 관리들의 비행을 규찰(糾察)하며,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의 민원을 해결해 주던 관청이다.

통일 신라 때부터 하던 것을 고려 제31대 공민왕(1369년)에 이르러 사헌부란 이름으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 건국 초부터 사헌부를 설치 감찰행정을 맡게 하였다.

사헌부는 국가기강과 관련한 광범위한 규찰 권한을 지녔기 때문에 왕의 언행이나 나랏일에 논쟁하고 비리 관리를 적발하면 서슬이 퍼런 월광참도(月光斬刀)로 베듯 탄핵하는 관청이다. 언행을 감시당하고 비리를 조사당하는 왕이나 대신들 눈엣 가치처럼 여겼던 조선 검찰이다.

사헌부는 부정을 적발하고 그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등 형조(법무부), 한성부(서울시청)와 더불어 삼법사(三法司)로 불렸다. 사헌부는 형조, 의금부(義(禁府)와 함께 중대한 범죄자에 대한 국문(鞠問)을 담당했다. 세종 때 이 제도가 정착되었다가 연산군이 사헌부의 권한을 박탈해 왕 직속 의금부로 넘겨 급기야는 사헌부를 폐지하였으나 쿠데타로 연산군이 축출되고 제11대 중종이 즉위한 후 사헌부가 원상으로 복귀했다.

조선은 임금과 신하는 물론, 어느 한 기관도 독주할 수 없는 상호 견제의 원칙을 제도상으로 완벽하게 확립했다. 의정부(국무총리)와 육조(六曹) 판서들의 전횡을 사헌부의 탄핵권으로 견제케 했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면 지위를 막론하고 사임토록 했다.

이런 막강한 사헌부, 사간원의 인사권은 정승이나 판서들의 인사개입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정5품 이조정랑(행정안전부)에게 전권을 줬다. 수사권 역시 사헌부를 비롯해 의금부, 형조, 포도청(경찰청) 등에 분산시켜 독주와 전횡을 방지하고 정의실현에 만전을 기했다.

상호견제의 제도가 확립되었음에도 조선 건국 초부터 사헌부와 왕들의 갈등이 이외로 심했다.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세종, 하지만 권력자로서의 세종은 어두운 그림자 또한 갖고 있었다. 태종은 1418년 맏아들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왕세자로 삼아 왕권을 이양했다. 양녕을 폐위한 이유는 태종의 공신이었던 윤자당의 애첩을 빼앗고 임신시키는(1418년3월6일 ‘세종실록’)등 말썽을 부리자 태종은 무수히 타일렀으나 뉘우치지 않아 양녕을 광주로 쫓아버렸다.

그때 태종이 내린 명은 “내가 죽은 뒤에도 양녕은 서울에 내왕하지 못한다”고 한 태종의 엄한 영구 추방령을 양녕은 무시하고 도성에 출입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묵인했다. 그러자 사헌부 집의 김종서가 세종에게 상소했다. ‘간통해서는 아니 될 여자와 간음하여 스스로 법을 어겼으니, 형제간 우애도 좋지만 공도(公道)를 좇아 달라’ 왕일지라도 법을 지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사헌부 김종서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부 김종서가 세종에게 대놓고 따졌다. ‘왕의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신하(臣下)이니 마땅히 추국(推鞠)해야 한다’며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세종이 미적대자 사헌부관원들은 즉석에서 ‘대의로써 결단하시라’ 그래도 세종은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사헌부는 물론 사간원(司諫院) 관리들까지 세종에게 처벌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그런 요청에 세종은 “옛말에 세 번 직언을 해도 듣지 않으면 사표를 낸다고 했거늘, 당신들이 그만두면 되지 어찌 그리도 말이 많은가”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 모두가 사표를 제출했다.(1428년1월18일 ‘세종실록’) 사헌부 집의 김종서는 ‘죽기를 작정하고 다시 처벌을 요청한다. 그때 다른 사간원들도 동조하여 올린 처벌 요청이 무려 열세 번이었다.

이에 세종은 사헌부 전관원에 대한 인사를 전격 단행한다. 사헌부 대사헌 김맹성을 형조참판으로, 집의 김종서는 한직(閑職)인 농지담당관으로 좌천성 인사를 발령하고 장령(將領)들은 파면시킨다. 새로 임명된 장령 진중성 역시 양녕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사흘 뒤 ‘옛날 사헌부에 들어 왔을 때 ‘세금포탈범을 눈감아 준 혐의’로 전 대사헌 김맹성, 전 집의 김종서, 전 장령 등을 의금부에 전격 체포 구금했다.(1428년2월7~29일‘세종실록) 김종서가 사헌부에 들어온 해가 1419년이니 무려 9년 전 일을 들춰내 입을 틀어 막아버린 것이다. 이렇듯 세종은 법과 형제간의 우애 사이에서, 우애를 택해 성군으로서 믿기지 않은 세종의 민낯을 ’세종실록‘에 드러나고 있다.

1504년 연산군 때 사헌부 수난사, 연산군의 애첩인 장녹수가 이웃집들을 불법으로 빼앗다 사헌부에 적발됐다. 이에 연산군은 “사헌부가 민원을 빙자해 개인 간의 일에 간섭했다. 이는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선동하는 행동이다” 선동가로 찍힌 대사헌 이자건, 대사헌 박의영, 집의 권홍 등 사헌부의 감찰권을 박탈하고 사간원까지 체포했다.(1504년3월12일 ‘연산군일기’) 이듬해 연산군 명으로 대제학 김감이 쓴 혁파문(革罷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랫사람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임금을 손 위에 놓고 권력이 이들에 돌아가리라’는 글을 목판으로 새겨 보존하라고 지시했다.(1505년1월13일 ‘연산군일기’) 사헌부를 폐지하고 감찰권은 의금부로 넘겼다.

그 뒤 1505년9월2일 폭군 연산군은 쿠데타로 축출되고 중종이 즉위했다. 한 달 뒤 연산군 때 구속되고 고문당했던 전 사헌부 장령 유승조가 중종에게 말했다. “사헌부 대간들은 국가를 위해, 대신들은 권력을 위해 입을 여는 것이니 대간의 말을 따르소서” 공의(公儀)를 앞세웠다가 화를 당했던 조선의 검찰, 사헌부 학살 수난사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근래 청와대와 검찰 간에 벌어지고 있는 불편한 관계가 떠오른다. 지난 1월8일 현 정권의 청와대 불법 의혹과 측근 비리를 수사하자 청와대와 법무부가 마치 군사작전이라도 하듯 기습적이고 전격적으로 검찰 인사를 단행했다.

정권에 대한 수사를 한다고 핵심 검찰 인사들을 전국으로 흩어 놓은 건 결국 수사를 하지 말라는 압력성 인사가 아닌지 의심된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에 가까운 숙청 같다는 생각도 든다. 권력으로 수사를 일시적으로 덮는다 해도 국민의 눈까지 가릴 수는 없지 않는가.

지금의 검찰이나 사헌부가 왕권에 휘둘리면 국가 기강에 큰 폐단을 낳을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고 있다. 사헌부가 제 기능을 수행되면 왕권의 독주를 막고 균형 있는 정치를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검찰청도 조선시대 사헌부와 다를 바 없는 사정기관이다. 600년 전 옛날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그 역사적 사실은 언제 다시 보아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실을 통해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선비들이 선대의 사실들을 가감 없이 후대에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실 그대로를 실록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게 바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제된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 518년 동안 27명의 임금이 있었다.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아야 할까. 오늘날 우리사회가 과연 목숨을 걸고 진실을 담았던 조선의 사관(史觀)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을까.

부산 황성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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