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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2)

admin 기자 입력 2020.03.18 10:47 수정 2020.03.18 10:47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부왕인 세종의 바람대로 왕권 정통성을 계승하여 정당한 자격을 갖춘 문종은 1450년에 즉위 하였다.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 준 집현전 학사 출신 서연관(書筵官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또는 관원)들을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으로 중용 하였다.

왕위에 즉위 하고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더욱더 요직에 임명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 할 수 있었다.

결국 문종의 정치적 측근들은 집현전 학사 출신들로 구성 되었으며 이것이 뒤에 사육신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시대에 제일 화려한 업적의 하나인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몇 십년동안 길러 인재들을 배출시켰다.

예부터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고민이 하나씩 있었다. 바로 배움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조선시대 자신의 배움과 가치를 죽음으로 증명한 이가 있으니 바로 사육신이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려 있는 이야기 중 세종 때 집현전 남쪽의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1449)년과, 경오(1450)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어 새끼를 낳았다. 신기하게도 모두 흰 까치였다 그 후 몇 해 사이에 요직에 오른 이는 모두 집현전 학사들이 차지했다.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조선전기 학자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은 한문 수필집이다 당대 인물의 사사로운 이야기와 역사에 누락된 사실과 시중에 떠돌던 한담(閑譚)들을 채록한 것이다. 필원잡기 간행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자면 필원잡기 원본은 모두 2권 1책으로 엮어져 있는 목판본이다.

1487년 (성종18) 경상도 의성에서 처음 간행 되었는데, 서거정의 문인이던 의성 현령((縣令) 유호인(兪好(仁)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간에서 서적을 출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절 이었기에 대다수 책은 지방관의 도움으로 출판되곤 했다.

이 책도 바로 그런 케이스이다 당시 관찰사로 있던 이세좌(李世佐1445~1504) 역시 서거정의 문인 이었기에 간행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는 개인 저서 이지만 관찬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조선 초기 유명한 문신이자 문장가인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이 인각사를 찾아 지은 시가 인용되는데 그 시는 질금병작무심처유득잔비낙조(窒今甁雀無尋處留得殘碑落照)

지금은 병속의 새 찾을 곳 없고 낙조 속에 비바람에 씻긴 비석만 있네 라는 글이 있어 유호인은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 현령으로 부임 하였다. 어느 날 유호인은 인각사를 왔다가 보각국사 일연 비를 보았던 것이다.(인각사 탐방객들에게 이 시를 낭송해 주면 비각 안에 있는 조각난 보각국사비를 보면서 “진짜 병속에 갇힌 새 같아요” 라면서 안타까워 했다)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1450년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했다 문종 시대 정치는 세종 후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도 문종의 탁월한 능력을 칭찬했는데 병법과 군사 분야에 4군 6진을 포함해 북방을 정비 하였고 화차 같은 신병기를 개발 하였으며,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 하였다.

측우기와 천체관측기구를 장영실과 함께 개발 하였으며조선 이전의 나라였던 고려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29년간 왕자 수업을 받았고 세종을 대신해 8년간 대리청정을 하며 아버지 못지않은 능력에 군왕의 자질을 갖추었지만 안타깝게도 아내 복은 지독하게 없었다.

세자시절(문종)은 세 번의 결혼에 두 번 이혼을 했다.
1427년 세종9년 4월9일 기록에 안동김씨 가문 출신으로 상호군 김오문의 딸이자 태종의 후궁인 명빈김씨 조카인 김씨를 왕세자(문종)의 휘빈(徽嬪)으로 봉하였다고 나와 있다. 결혼을 할 때 세자(1414~1452)는14살 휘빈(徽嬪김씨1418~?)은18세로 4살이나 더 많은 연상 이었다 수려한 외모의 세자와는 달리 휘빈(徽嬪)김씨는 박색이며 키가 상당히 컸다 당대의 남자들과 비슷했다고 한다.

첫날밤 이후로 세자는 세자빈을 찾지 않고 학문과 연구에만 몰두했다 사실 문제는 세자가 궁녀 효동(孝童)과 덕금(德金)을 매우 총애했던 것이다 세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던 세자빈은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은 이유가 수발드는 궁녀들과 놀아나고 있다고 생각한
세자빈은 평소 시기하던 효동(孝童)과 덕금(德金)이 김씨보다 더 세자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자 휘빈(徽嬪)김씨는 그런 사태를 막고자 했다.

당시 한양에는 하봉래 라고 하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그 기생은 정효문이라는 양반의 첩이 됐을 뿐만 아니라 본부인을 밀어내고 사랑을 독차지하기까지 했다. 하봉래에게 푹 빠진 정효문이 본부인을 쫓아냈던 것이다 그때 한양에는 하봉래 처럼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한 첩들이 많았는데, 그 첩들은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비법을 이용하는 것으로 소문났다. 휘빈(徽嬪)김씨는 바로 그런 비법을 이용해 자신도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했다.

휘빈(徽嬪)김씨의 시녀 중에 호초(孝童)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호초 역시 양반 첩의 딸이기에 하봉래 등과 잘 알았다. 휘빈 김씨는 호초에게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 할 비법을 물었고, 호초는 하봉래에게서 들은 비법 두 가지를 알려 줬다.

첫째 비법은 세자가 사랑하는 효동(孝童)과 덕금(德金)의 신발을 불에 태운 뒤 가루를 술에 타서 세자에게 먹이는 것이고, 둘째는 두 뱀이 교미할 때 흘린 체액을 수건에 묻혀 차고 다니는 것인데, 세종10년 겨울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휘빈김씨는 두 가지 압승술(壓勝術주술이나 주문으로 화복을 만든다는 방술)을 열심히 행하였다. 남편이 좋아하는 다른 여인의 기를 눌러 자신이 사랑싸움에서 이기는 술책을 섰지만 효과는 보지 못하고 소문만 퍼지고 말았다.

세종은 이런 휘빈김씨가 훗날 왕비가 되면 큰일 나겠다고 판단해 1429년(세종11) 7월 18일로 세자빈을 사가로 폐출 하였다.

또한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金五文)과 큰아버지 김중엄(金仲淹)도 파면 시켰다. 또한 세자빈에게 압승술을 가르쳤다는 죄로 호초(胡椒)는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 유교윤리상 왕실 여인의 행동으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이지만 갓 스물의 휘빈 김씨를 2년 만에 서둘러 폐위 시키지 않고 좀 더 기회를 주고 기다렸더라면 하는 가엾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의 조급함이 화를 부른 결과이다. 휘빈김씨가 남편의 사랑을 갈구 한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음험한 방법으로 갈구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세자(문종)의 나이 열여섯에 두 번째 혼인을 한다.
창녕 현감(昌寧縣監) 봉려(奉(礪)의 딸이다 1429년 세종(11)음력 10월 15일 폐출된 휘빈 김씨의 뒤를 이어 세자빈에 책봉 되었다.

봉씨의 아버지 봉려는 종 2품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으로 승진하였다 세종은 첫 번째 며느리가 용색이 뛰어 나지 못해서 세자의 관심을 사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두 번째는 용모도 고려했다고 한다.

게다가 휘빈 김씨가 어지간한 남자와 대등할 정도로 키가 큰 편이라 키가 큰 여자라서 방중술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이번에는 좀 더 겉보기에 몸집이 작고 아담하게 생긴 봉씨를 세자빈으로 발탁했다. 키 작은 여자는 얌전 할 줄 알고 일부러 키가 작은 세자빈을 들였다 외모 검정이 세종에게는 커다란 패착(敗着)이 되었다.

순빈봉씨가 휘빈김씨보다 더 거침이 없었는데 음주가무에 술주정, 궁녀들에게 패악질, 심지어 태기가 있다고 하다가 유산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며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는 순빈봉씨를 세종은 끝까지 우대했다 그 이유는 세자(문종)가 또 이혼을 했다가 왕실에 먹칠이 되고 세자에 대한 평판자체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종과 소헌왕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궁녀 소쌍과 살을 맞대고 누웠다 즉 대식(大食)을 하였다는 것이다 대식(大食)이란 궁궐에서 여자들끼리 벌이는 동성애를 뜻 한다 원래 대식은 궁녀들이 가족이나 친지를 궁궐 안으로 불러 같이 식사를 하는 제도였지만 언제부턴가 일부 궁녀들의 일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기록에 세종은 세자빈에게 아이가 없고 투기를 하는 것 등을 이유로 삼아 세종(18)1436년 10월 26일 결혼 7년만에 그녀를 폐출 한다. 다만 세자빈과 궁녀가 정을 나눈 일은 추(醜) 하므로 공식적인 교지에는 질투가 심하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쓸 것을 명하였다.

순빈봉씨 사건으로 세종이 한탄한 내용은 바로 바닥 밑에는 더 한 바닥이 있다 라고 말했다 임사홍 말대로라면 세종은 첫번째 며느리인 휘빈김씨를 쫓아낸 걸 후회 했다는 걸 증명했다.
뒷날 폐비 윤씨를 폐하려는 성종에게 반대한게 임사홍(任士洪1445~1506)인데 이때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세종대왕께서 휘빈을 쫓아내고 나중에 후회하셨습니다” 였다 임사홍 말대로라면 세종은 휘빈을 쫓아낸 걸 후회했다는 방증이 된다.

휘빈이 사랑을 얻기 위한 괴이한 행동은 적어도 순빈봉씨의 동성애 보다는 왕실의 입장에서 더 낫다고 생각을 했던 것 것이다.

또 하나 조선후기 영조(3)1727년 조현명이 올린 상소문에는 예전부터 궁인들이 대식(大食)을 핑계 삼아 날이 갈수록 천한 비구니나 과부와 통정하오니 출입을 준엄하게 하여 그들이 안 밖으로 왕래를 끊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궁녀는 실제로 왕족들이 자신들의 생활상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존재이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이다.

조선초기 세종시절에 대식사건이 여러 건 발각 되었지만 근절되지 않았고 조선후기 영조시대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궁녀들이 얼마만큼 오랫동안 은밀하게 대식(大食)을 행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대식(大食)사건을 보면서 궁궐 속 세자빈과 궁녀들의 삶을 살펴보고 현제의 시각으로 비교해 보았다.

인류 역사 속에서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달라지면서 그에 따라 성에 대한 가치관, 태도, 제도도 계속 변화되어 왔다.

동성 간의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상 항상 존재해 왔다. 조선이라는 특정시기에 동성 간의 사랑은 유교이념에 의해 비정상적 일탈로 간주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 내몰렸다.

현제의 성문화는 인간의 다양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역시 존중 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빠르게 변화 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성애는 쟁점을 만들어 내고 제약을 받고 있다고 본다 (다음호 계속)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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