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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4)

admin 기자 입력 2020.04.19 16:51 수정 2020.04.19 04:51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조선왕조 27명의 왕 가운데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제대로 왕답게 왕권을 행사한 왕은 매우 드물었다.

조선의 역사가 매우 복잡하면서도 극적인 면모를 갖게 하는 사연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왕이 문종이다.

태조부터 이어져 5대에 와서 실현된 적장자 왕위계승원칙으로 조선왕실의 상징적 왕을 자신의 적장자로 만들어 낸 세종은 뜻을 이룬 셈이다.

유교적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자(문종)를 심혈을 기울여 최고의 왕재로 (王才)키웠는지 알 수가 있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세종 이후 문종의 죽음은 조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고 만다. 문종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재위 기간 동안 왕후가 없는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후비를 들이지 않았고, 조선 최초로 세자섭정이 문종이다. 1442년 세종은 자신을 대신해 29살 세자(문종)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뜻을 밝혔다. 세자의 성품이 세종을 닮아서 아버지 뜻을 충실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자(문종)가 부왕인 세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수행했던 기간을 통하여 임금 노릇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세종이 30세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온갖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1445년(세종 27년)부터 이미 세자의 자격으로 신하들의 조회(朝會)를 받고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를 처결하였기 때문에 세자 때부터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1450년2월 세종이 죽자 문종(1414∼1452재위기간 1450년2월∼1452년 5월)은 조선 5대 왕으로 등극한다.

문종의 성품은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에 대한 우애가 깊고 노래와 여색 등을 좋아하지 않았고 외모는 명나라 사신에게 이미 인정받은 아름다운 인물로 증명되었다. 효심과 관련된 사탕이야기가 있다. 옛날 조선에서 사탕이 얼마나 귀했는지 역사기록에도 확인된다.

세종때인 1446년 소헌왕후가 병에 걸렸다. ≪문종실록 문종 2년5월14일》 소헌왕후의 아들인 세자이향(문종)은 열심히 간호를 했다.

병중의 소헌왕후는 사탕을 맛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세자는 끝내 구하지 못했고 그런 상태로 소헌왕후는 죽었다. 소헌왕후의 삼년상이 아직 안 끝났을 때였다.

삼년상은 윤달을 제외한 25개월이었다. 어머니를 상실한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문종에게 사탕을 바쳤다. 사탕을 받고 어머니 생각이 난 문종은 어머니의 혼전(임시사당)으로 사용된 휘덕전(輝德殿)으로 갔다. 거기서 문종은 어머니 위패 앞에 사탕을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

왜 이제야 사탕을 구했단 말인가 하고 애통해했다는 일화이다.
혹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 가 보았다면 문종이 세자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한 아버지 세종을 위해 자선당 주위에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앵두를 따서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자선당을 앵두궁이라고도 하는데 궁녀들은 자선당을 앵두궁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종은 조선4대 명필로 유명한 안평대군과 자웅을 가리지 못할 만큼 서예에도 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문종은 조맹부의 서체를 좋아했는데 여기에 왕희지의 서법을 섞어 등불 아래에서 쓰더라도 정밀하고 기묘한 것이 입신의 경지였다. 그 글을 얻은 사람이 천금처럼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은 유교경전 뿐만 아니라 육예에도 능통하였고 천문과 역상(曆象)에도 능했다. 자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인간 세상에 적용하는 천문역법이야 말로 고대부터 치자(治者)가 알아야 할 필수적인 지식 가운데 하나였다.

천문학은 왕조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었다. 역경과 예기는 모두 세종께서 가르친 것이다.
특히 4군6진을 개척한 것과 여진족을 물리친 것은 당시로 보면 신무기인 화차를 개발하고 이것을 실질적으로 활용한 실무자가 문종이었다.

문종은 병석에 누워서도 조선의 정치 제도 문화를 정리하고자 1395년에 고려사를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였으며 고려사절요는 먼저 출간된 고려사를 연대순에 따라 사건을 다시 정리하여 완성을 본 것도 문종 때였다.

그러나 준비된 왕이었던 문종은 기대와는 달리 문종 시대는 제대로 뜻을 펴 보지 못하고 병약함이 작용했기 때문인지 신권(臣權)이 상당부분 신장 되었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위축되기도 했다.

임금 스스로 강한 신체적 에너지가 결여된 까닭에 국가 경영상 카리스마를 표출하지 못한 측면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게다가 이러한 신권 강화는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대군들과 종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커지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고 이는 차기 왕권 주자인 홍위(弘暐)즉 단종의 집권에 매우 어려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배경이다.

세종이 가장 역점을 두어 실천 했던 말과 인재 등용으로 소통정치를 이루었다면 문종 시대에 오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아낀 임금이지만 세종부터 이어져 온 안평대군과 효령대군의 불교숭상에 대한 신권 측이 내세운 유교 갈등으로 종친들에 대한 상소가 이어졌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시로 모든 국가의 기본구조를 마련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천년이 넘게 이어온 불교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철저히 배척했다.

불교로 인해 세종과 유학자 성균관생 등이 첨예하게 부딪쳤던 사건은 내불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1450년 2월 22일) 직후에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대자암(大慈庵) 개축공사와 부왕인 세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고 여러 차례 법회를 열었다.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유교는 내세관이 있는 종교가 아닌 현실 도덕사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에 관련된 인간 번뇌를 위로하는 기능이 없었다. 아마도 왕실과 백성들은 현실의 고통 치유와 사후 세계에 대한 답을 유교가 아닌 불교에서 찾아온 것이다.

불교는 종교로서 기능뿐 아니라 전통문화로서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그렇고 보면 전통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로라는 것은 항시 양날의 칼이다. 문종은 세자 때부터 평생을 따라다닌 지긋지긋한 종기로 문종의 건강에 그림자가 엄습한다.

사실 세종은 임종 직전까지 문종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 유교(遺敎)를 영의정 하연(河演1376∼1453년 세종∼문종조의 영의정)이 세종이 승하한 다음 날 문종에게 상기시켰다 “상을 치르더라도 3일 안에는 죽을 조금 먹고, 3일 후에는 밥을 조금 먹어야 병에서 벗어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종에게 가장 큰 화근은 식사가 아닌 고질인 종기였다. 갖은 의술을 시행해도 종기가 사라지지 않자 사헌부 지평 이의문은 어의들이 얼렁뚱땅 의술을 편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즉 노중례(?∼1452문종2년)와 전순의(全循義)등 어의가 의서를 두루 살피지 않는다고 했다. 집권 2년차인 1452년 5월 5일 종기는 문종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 문종의 병세가 날로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던 전순의는 5월 14일 갑자기 사정전 남쪽 회랑에서 수양대군, 강맹경, 김예몽 등과 뒤늦게 의학서를 뒤지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문종은 그날 오후 5시 강녕전에서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날까지도 문종이 세상을 뜨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 방망이였다. 그런데 근래에 발굴된 자료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 하려 했다는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애초부터 왕위 찬탈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의관 전순의가 수양대군의 비호를 받으며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정황도 발견됐다. 세조1년 계유정난으로 개국공신이 되었고 세조 10년에는 종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세조의 특별한 배려가 없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다. 문종독살설에 대한 반론도 있겠지만 전순의 어의가 바른 처방으로 치료를 했더라면 문종이 빨리 죽지 않았을 것이고 단종이 조금 더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올랐다면 계유정난과 같은 피의 잔혹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군주란 재위기간이 길고 짧고 업적이 많고 적은 기준의 잣대가 아니라 그 시대에 필요한 군주가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제2의 성군이었던 세종을 꿈꾸며 왕조를 이어가려던 문종의 펼쳐보지 못한 짧은 생애에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호 계속>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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