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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거친 파도를 넘어

admin 기자 입력 2020.04.19 16:57 수정 2020.04.19 04:57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꿈 많고 좌충우돌하던 학창 시절이 끝날 무렵이다.
젊음을 불태우며 겁 없이 달려든 인생의 삶을 향해 긴 항해를 시작한다.

미지의 세계를 꿈꾸며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노를 저어 간다.
고등학교 마지막 가을 소풍 때였다.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고리타분한 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도시락 간식거리 몇 개 싸 들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을 길을 걷고 있다. 가을이 익어가는 냄새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추잠자리 두 마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 사이를 누비며 노느라 정신없다. 잡으려 해도 노는데 정신 팔려 천연스럽게 놀고 있다. 풍성하고 살찐 이 가을이 지나면 엄동설한 겨울이 오겠지.

봄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생각 고민 갈등 번뇌 등을 등에 짊어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의 길을 찾아 나선다. 구름 한 점 없는 더 높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소박한 소원을 빈다.

소풍은 생각만 해도 설레고 즐겁다. 공부 지옥에서 탈출하여 자유롭고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며 참고 견뎌온 지긋지긋한 시간을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쁠 수 없다. 그러하던 소풍도 흘러가는 세월을 막지 못하고 내 곁에서 서서히 멀어져 간다. 생을 마감하는 듯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아쉬워하며 오늘 하루만이라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점심시간이 되어 싸서 가지고 간 점심이랑 간식거리를 먹으며 분위기가 한창 무럭무럭 익어 갈 무렵, 한 친구가 “야 우리 이렇게 놀 것이 아니라 소주 한잔하며 기분 좋게 놀자”하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 둘러앉아 있던 몇몇 친구가 그게 좋다고 하며 손뼉을 친다.

우리들이 모여 있는 데에서 300m 떨어진 곳에 가게가 하나 있다. 선생님 몰래 한 친구와 같이 가게에 갔다. 찌그러져 가는 가게는 태풍이 불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다. 진열대 안에는 과자 부스러기 몇 개와 소주 몇 병이 덩그러니 가게를 지키고 있다.

하얀 먼지가 소복 쌓인 소주병은 이름표마저 보이지 않는다. 아랑곳하지 않고 한 병 사서 가지고 왔다. 선생님 몰래 몇 명이 둘러앉아 45도 되는 독한 술 한 병을 거뜬히 해치웠다. 제사 지낸 뒤 음복 한 잔도 못 했던 나도 한잔했다.

얼큰하게 취해 정신없이 뛰놀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가 띵하더니 어지럽고 하늘이 노랗고 빙글빙글 돌며 친구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눈을 떠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멋모르고 무작정 달려들었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무서움이 밀려든다. 이튿날 학교는 가야하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어진다. 소가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것보다 더 싫다. 그러나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이 산을 넘지 않으며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 눈치를 보면서 불안· 초조 속에서 떨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고 학교에 간다. 체육 시간이다. 창피해서 선생님 눈을 피해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너 이리 와 봐” 하며 퉁명스럽게 부른다. 어제 그 일로 부르겠지 생각하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 다짜고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라고 하더니 너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며 호통을 친다. 우리들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던 친구들은 멀거니 서서 궁금해했다.

담임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우리는 분명 퇴학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하였다.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시자마자 얼굴을 붉히면서 딱딱한 마분지로 된 출석부로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러고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작심하신 듯 너희들은 “오늘부로 퇴학이다.” 하시며 불같은 호령을 내리셨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천진한 우리는 퇴학 되는 줄로만 알고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출석부로 정신없이 마구 때렸다. 한참 동안 적막감이 흘렀다.

우리들의 뜻밖의 대답에 선생님은 당황하신 듯 출석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눈물 흘리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들이 잘되기를 바랐건만 이게 무슨 꼴인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하시며 후들후들 떨며 말씀을 더 하지 못하셨다.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와 학교 뒷마당 느티나무 밑에 둘러앉아 대책을 숙의하였다. 선생님을 위로하는 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다 같이 대학에 붙는 길밖에 없다. 하며 굳은 약속을 했다.

약속한 대로 우리들은 법조 정치 교육 금융 등에서 젊음의 열정을 불태웠다. 선생님께 진 빚을 다 갚고 이제 사그라드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 있듯 아직도 나는 끈을 놓지 못하고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하고픈 생각과 의욕은 마음뿐 이제는 가는 세월 막지 못해 두려움이 앞선다.

가을 들녘에 황금빛 물결이 일렁일 때면 저희들이 잘못될 까봐 노심초사하시던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찾았으나 불행히도 근무지를 떠난 지 오래 되었다고 동료 직원이 말한다.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누구십니까?”
“고3 때 술 한 잔 마시고 인사불성 되어 퇴학당할 뻔했던 접니다.”
“깜짝 놀라시며 아이고, 너구나.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느냐” 하시며 반갑게 대답해주신다. 그러고 나서 첫 마디에 “그때 내가 너무 심했지?하시며 쑥스러운 듯 말씀하신다.

“아닙니다. 선생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잘 있느냐?
“네,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거칠게 몰아붙인 파도를 넘어 여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던 것을 생각하며 꿈만 같다. 어느새 촘촘하든 머리가 다 빠지고 듬성듬성 남은 몇 가닥 머리가 햇빛을 가려주고 있다. 긴 항해 끝에 무사히 배가 도착한다. 여명이 밝아 온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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