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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5)

admin 기자 입력 2020.05.04 22:30 수정 2020.05.04 10:30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현덕왕후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弘暐) (1441∼1457)왕자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산욕으로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惠嬪楊氏 생년미상 ∼1455년 음력 11월 9일)에게 남매의 양육을 부탁하게 된다.

원손(단종)은 세종의 후궁이자 서조모격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혜빈양씨는 후덕한 여자였고 지극한 사랑을 주며 기른 탓인지 원손은 혜빈의 품에서 잠들기를 늘 원했다. 원손이 자라며 성인의 덕성을 갖게 된 것은 혜빈 양씨가 바르게 기른 공이 크다고 한다.

혜빈양씨는 본관이 청주사람으로 아버지는 남평현감 양경이고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3남을 두었다. 영풍군은 박팽년의 여식과 결혼하였으니 혜빈양씨와 박팽년은 사돈 간이다. 혜빈양씨의 고모부가 왕희정승이다.

원손(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원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 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교육을 맡았다. 원손인 홍위가 8살 되던(1448년 세종30년)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10살 되던 해에 바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문종이 재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1452년 승하하자 4일이 지난 뒤 단종(端宗)(재위기간 1452년 5월∼1445년 윤6월 3년 2개월)은 근정문에서 즉위교서를 반포하고 조선 제 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단종의 즉위교서 핵심은 국정의 모든 조처를 의정부와, 육조가 함께 의논하여 시행한다.

왕에게 직접 했던 육조의 보고를 의정부를 거쳐 보고 한다고 하였으니 단종 즉위 후 김종서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왕 중심의 정치가 아닌 대신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고명대신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5월 15일 기사 중에서〉 소자(小子)조종(祖宗)의 업을 능히 담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연못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도 같이 매우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에게 물어 한결같이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라니, 그대들 대소 신료는 각각 맡은바 직책을 다하여 힘써 나의 정치를 보좌할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종은 즉위는 했지만 아직 12세에 불과 했기 때문에 김종서(金宗瑞)와 같은 고명대신들의 권력이 커 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관리를 뽑을 때 삼망(三望)이라 해서 임금에게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는데 고명대신들이 미리 노란 동그라미를 쳐서 표시를 했다. 이를 황표정사(黃標政事)라 한다.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의정부 대신들이 장악한 셈이다. 김종서는 철저한 신권(臣權) 강화론자였고 황표정사의 권한까지 가졌으니 당시는 거의 김종서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단종이 즉위하고 대사헌 기건(大司懸奇虔)이 상소하여 대신들은 종친(宗親)을 견제하기 위해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만들었다.

분경(奔競)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벼슬을 얻기 위해 권력자의 집을 드나드는 것으로 일종의 인사 청탁을 말한다. 여러 대군이 궐내에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국정에 대하여 간섭하며 문하에 사람을 모아 정치를 의논하는 것을 금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것은 임금이 어리신 것을 이용하여 강성한 숙부들이 국정을 휘두르며 조정을 장악할 빌미의 염려가 있는 때문이니 분경금지법 확대실시는 어린 왕 주위에 종실들이 기웃거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뜻 이기도하다.

수양대군은 권람과 한명회를 불러 분경에 대한 교서를 이야기하자 한명회는 펄쩍 뛰며, 분경은 종친의 수족을 얽어매어 가두어 놓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며 종친의 분경(奔競)을 금한다는 것은 종친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안평대군과 함께 의정부를 찾아갔다.

영의정(領議政) 황보인과 우의정(右議政) 정분 의정부에서 국사를 논하고 있었다. 마침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는 이날 자리에 없었다. 황보인 이하 여러 집정(執政)이 모인 곳에서 수양대군은 종실을 의심함은 무슨 까닭이냐고 이것은 필경 우리를 욕보이려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항의하자, 결국 대신들은 대군(大君)의 집에 분경(奔競) 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고 대군들에게 특권(特權)이 생겨버렸다.

결국 명분에 밀린 단종은 즉위교서 하루 만에 분경 금지법을 철회하고 만다. 태종은 분경금지법을 가장 엄하게 시행한 왕이었다.

이조와 병조에 소속된 인사 관련 실무자에게 따로 감시자를 붙일 만큼 철저한 정보정치를 했다. 단종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분경금지법을 철회하지만 않았더라면 왕권강화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수양대군의 세력은 원천 소멸되어 계유정난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불만은 분경금지와 황표정사 였다. 황표정사 제도가 좋게 보면 경륜이 많은 의정부가 수렴청정을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종친의 입장에서 보면 힘들게 일군 조선이라는 나라가 몇몇 신하에게 빼앗기는 꼴이 되니 수양대군으로선 나라를 고명대신들에게 넘겨 줄 수 없다는 명분을 준 것도 따지고 보면 황표정사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단종의 정국 구도는 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대신파와 수양대군파로 나뉘어진다.
수양대군은 이런 상황에서 의정부로 집중된 권력을 견제하고 정치권력의 중심을 다시 왕실 중심으로 회복해야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그 1452년 7월 28일 권람의 추천으로 한명회를 만났다 신숙주 등의 문신과 홍달손 등의 무신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여 완벽한 적통을 몰아내기 위한 피의 숙청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양과 안평은 서로 경쟁을 벌이기까지 하였으며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은 어린 왕을 보필 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 인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수양대군의 불안감이 고조되자 안평과 형제이지만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처음 만난 뒤 “나라의 선비라고 극찬하면서 오랜 친구 처럼 여겼다. 수양은 한명회의 건의에 따라 세력을 은밀히 키워 나간다. 14개월 뒤에는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왕위 찬탈 수순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발단은 이러하다 단종(端宗)원년 1453년 9월 25일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측근인 권람(權擥)이 노비인 계수(桂水)의 고발이었다.

계수는 황보인(黃甫仁)의 노비와 함께 가죽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에게서 황보인이 김종서(金宗瑞)등 재상들과 결탁해 국왕을 폐위하고 안평대군을 옹립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고변(告變)했다.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시라 재촉했다고 하지만 이미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안평대군 등 종친(宗親) 까지 포섭하자 수양대군은 큰 고립감과 위기감을 느끼자 결국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이 먼저 역모(逆謨)를 도모(圖謨)하고 있다고 몰아갔다.

실록에는 안평대군이 단종원년 1453년 10월 20일 전 후로 거사(擧事)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이것을 막기 위해서 일종의 역(逆)쿠테타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기록돼 있다 계유정난은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정치적 변란(變亂)이다.

나는 수양이 계유정난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계유정난을 일으킨 실록의 기사를 보면 이미 수양은 따를 자와 떠날자 나누고 결국 살생부로 처리 하겠다는 뜻이다.〈단종실록 8권, 단종1년 1453년 10월 10일 계사 1번째 기사〉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에 죽을 뿐이다 따를자는 따르고, 떠날자는 떠나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정난(靖亂)은 사전적으로 나라가 처한 병란이나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하는 듯이다 유학을 중시하는 왕조 시절에는 정난을 왕 주위에서 발호(跋扈 신하가 권력을 휘둘러 오만방자하게 구는 모습을 비유한 것)하는 간신을 처단한다는 뜻으로 주로 쓰였다.

계유정난은 왕위 찬탈과 단종의 숙청 비극의 역사 중심에 선 문약한 단종시대의 권력구도가 낳은 그림자라 할 수 있다.(다음호에 계속)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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