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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6)

admin 기자 입력 2020.05.19 22:31 수정 2020.05.19 10:31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왕위찬탈, 단종복위 운동과 사육신의 죽음, 단종의 유배에서 죽음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과 한 시대의 국가적 반란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힘의 게임이었다.

신권(臣權) 정치는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엘리트 신하집단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정치형태이다 연산군과 광해군 같은 경우는 폭군으로 규정하고 전 왕을 내 쫓고 새 왕을 세우는 王과 臣下 간의 대립의 성격이 짙다 이때 신하들은 자기들이 몰아낸 왕은 폭군이고 새로 추대한 왕은 성군이기 때문에 올바른 정치로 되돌려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성을 회복했다는 의미의 反正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연산군과 광해군 왕조와는 다르다. 수양대군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리지만 수양대군은 자신이 가지고자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는 바로 권력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명분을 삼은 것은 간신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과 부동하여 자차 안평대군(1418~1453)을 왕좌에 추대하려는 모반을 꽤했다는 부분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진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상황이 계유정난를 일으킬 정도로 혼란스러웠거나 사회경제적으로 모순이 심화되었던 상태는 더욱 아니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의 일부 정승이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독주하는 것에 대해 같은 불만을 품고 있던 집현전 출신 유신을 비롯한 일반관료들의 지지와 정치무대에서 소외당한 한명회 같은 하급관리 및 홍달손을 비롯한 무사들을 규합하여 나라의 위난(危難)을 평정한다는 구실 아래 정권 탈취를 위한 계획을 추진한 것이었다.

피의 숙청 계유정난이 성공 할 수 있었던 세력은 권람과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조의 심복 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주축으로 하는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눠진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百官)들은 의정부(議政府)는 알고 있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지가 오래 됐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하위지 등 집현전 출신의 유신(儒臣)들과도 의정부와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고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이었다.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 했다는 것과 또 하나 왕권이 완전히 떨어 졌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명분이 수양대군 심복들은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집현전 학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뒷날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많은 집현전 출신 관료가 수양대군에 동조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일등 공신으로 권람(權擥)이 수양대군의 좌장 역할을 했다면 한명회(韓明澮)는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였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보면 한명회는 난세의 영웅이요 모사에 능하고 시대의 허점을 꿰뚫어 과단성 있게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미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殺生符)에 따라 정적인 의정부 대신인 김종서, 황보 인 등 가장 큰 견제세력 이었던 친동생 안평대군까지 모두 제거하였다.

수양의 의도대로 피로 얼룩진 계유정난으로 조선은 그들의 손 안에 넘어갔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이 성공하자 자기편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중 본인을 포함한 43명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전지와 노비, 금은보화 등 많은 상을 내렸다.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 편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그의 무단통치에 협력한 사람은 한명회, 신숙주, 권람(權擥)이었다. 수양대군 일파는 우선 단종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공신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게 하여 자신들의 반란을 정당화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단종2년 1454년 1월 24일자에 단종의 교지가 기록되어 있다(내용은 생략)

계유정난 이후 단종에게 받은 수양대군의 관직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영의정대표), 영경연사(領經筵事왕이주관하는경연), 판이조사(判吏曹事문관인사담당), 판병조사(判兵曹事무관인사담당),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천문관측담당) 여기다가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까지 겸직에 올라 모든 권력은 이제 수양대군의 손안에 있게 되었다.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세종과 문종의 충신들과 종친 세력을 몰살하면서 왕권을 탐하여 저지른 비윤리적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그래서 계유정난의 배경에 대하여 실록 부분을 보면 많은 의문점이 든다.
안평대군은 진짜 역모를 도모하였을까?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안평대군이야 말로 세도를 누릴지는 모르나 역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가 있을 동안에 김종서와 함께 일을 꾸미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양대군은 심복 권람과 한명회가 명나라 가는 것을 극구 만류 하자 황보 석(황보 인의 아들) 김승규(김종서의 아들)을 데리고 가면 그 누구도 다른 뜻을 품지 못한다며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위장술을 펼쳤다. 지난 2019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방송에서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조선판 데스노트가 방영되었다. 1447년 4월 20일 밤에 안평대군은 기묘한 꿈을 꾼다.

박팽년과 함께 어느 노인이 알려준 길을 따라 가보니 도원에 이르는 꿈이었다 안평대군은 평소 산수를 즐기는 마음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하고 그 꿈을 간직하고 싶어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안견(安堅?~?)에게 도원을 거니는 꿈을 전했고 안견은 사흘 만에 안평대군의 꿈을 완벽하게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려냈다.

도원의 경치를 그린 그림과 함께 찬문은 안평대군과 문인 20명 고승(高僧)1명 포함해서 23명의 찬문이 곁들여있다.

최수(崔修) 만우(卍雨스님) 김수온(金守溫) 성삼문(成三問) 서거정(徐居正) 이현로(李賢老안평대군 책사) 이예(李芮) 윤자운(尹子雲) 박팽년(朴彭年) 김담(金啖) 송처관(宋處寬) 하연(河演) 이개(李塏) 이적(李迹) 김종서(金宗瑞) 박연(朴煙)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최항(崔恒)등은 천문학자, 집현전 학사출신, 문신, 외교관 등 관직직위까지 당시 쟁쟁한 인물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득종은 찬문의 맨 앞에 글이 실렸는데 병으로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죽었기 때문에 몽유도원도가 데스노트 즉 죽음의 노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안평대군과 김종서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 목숨을 잃은 박팽년, 이개, 성삼문이 죽었기 때문에 일명 살생부 이름이 적힌 죽음의 노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몽유도원도 그림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어떤 설에 의하면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찬문인 사본이 유출되어 한명회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 30년 1448년 안평대군이 31살 되던 어느 날에 안견이 그린 25세 때의 자기 초상화를 보여주며 신숙주에게 찬문(贊文)을 부탁했다.

32세의 신숙주(1417~1475)는 자기보다 한 살 연하의 안평대군에게 「뛰어난 자태는 세상에서 제일이다」라는 칭찬을 하면서 나이가 들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이니 뒷날 머리가 희긋희긋 해진 초상화를 다시보며 덕(德)과 도(道)를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보냄으로써 경계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했다면 신숙주는 당태종이 아꼈던 위징(魏徵)에 비유했다.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징은 당 태종의 문화통치를 수행하여 당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조는 위징을 신숙주에 비견했는데 신숙주는 위징처럼 바른 직언을 하며 세조는 당 태종처럼 위징의 바른 직언을 듣고 나라를 다스렸을까? 하지만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고도 많은 집현전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편에 서게 되었다.

수양대군 측에 서서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이는데 적극 가담하여 정난공신 1등이 되어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권력의 편에 동조하여 화려한 정치생활을 하다가 1457년(성종6)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신숙주의 失과 功은 어떻게 평가 할까(다음호에 계속)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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