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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산의 중심은 동래부(東萊府)였다

admin 기자 입력 2020.06.03 22:31 수정 2020.06.03 10:31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조선시대 부산은, 동래읍성이 중심이었다.
부산이 우리나라의 관문과 외교의 중심지로 부각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그러한 모습은 현제까지 동래 일원에 남아 있는 관아(官衙)건물과 동래읍성, 동래향교 등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동래는 일본과 마주하고 있어서 국방의 기능이 중시되었고, 동시에 교린(交隣)외교의 창구였다. 또 임진왜란을 치루면서 나라를 지켜낸 고장으로 그때 순절한 호국영렬들을 기리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동래에는 삼한시대부터 거칠산국, 장산국, 독로국 등으로 불리던 소국들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동래지방의 성에 관한 구체적 내력으로는 1021년 고려 현종 12년에 동래군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그 후 1387년 고려 우왕 13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현재 동래시장 일대에 동래읍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4km 높이가 4~5m로 조선전기까지 유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래읍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동래읍성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1388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래 200년 동안은 거의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그런 떼에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를 치기 위한 구실로 1592년 4월13일 일본의 20만 대군으로 조선에 쳐들어왔다.

외적 방어의 전초 관문이었던 동래읍성은 부산진성, 좌수영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었다. 임진년 4월 14일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곧 바로 동래성으로 공격해 왔다.

일본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전측전의 불전측가도(戰側戰矣 不側戰假道), 즉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고 쓴 깃발을 내걸었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 어렵다’는 글을 목패(木牌)에 써서 적들에게 던지고 끝까지 항전하였다.

열세에 밀려 읍성이 함락 당하자 송상현부사는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걸쳐 입고 왜적을 맞아 준엄하게 꾸짖었다. “우리는 너희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단 말이냐”라고 꾸짖었다.(선조실록 4월) 그러자 일본군은 그를 한칼에 베어 버렸다.

선조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백성의 안위는 팽개치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 갔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노량으로 달아나 버렸다.

선조를 비롯한 많은 백관들이 제 한 몸 살려고 도망가기 급급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생각할 때,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미련 없이 던지고 군관민들과 운명을 함께했던 동래부사 송상현공의 의연한 모습은 우리역사의 자부심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나고 딱 10년이 지난 1607년(선조 41)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은 4월 15일 새벽 늙은 아전과 고을을 순시하던 중에 집집마다 담장을 넘나드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곡(哭)소리의 연유를 아전에게 물었다. 아전이 답하길 10년 전 4월 15일 왜적이 동래성에 쳐들어 왔을 때 관민이 함께 왜적을 막으려다 동래사람 천 명 백 명 중에 한둘만 겨우 살아남은 이들의 곡성이다.

어느 집은 대가 끊였고, 누구는 부모형제를 다 잃었다. 심지어 가족 모두가 목숨을 잃어 곡해 줄 사람조차 없는 집이 부지기수라 했다. 동래읍성 전투의 참상을 들은 동래부사 이안눌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이라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시를 짓는다.

합경구입성(闔境寇入城)
경계를 넘어 도적이 성안에 들어오자,
동시화위혈(同時化爲血)
한꺼번에 모두들 핏덩이가 되었다.
투신적시저(投身積屍抵)
몸을 날려 시체로 쌓일 적에,
천백유일이(千百遺一二)
천 명 백 명 중 한둘만 남았다오.
소이봉시일(所以逢是日)
그런 연유가 있어 이날을 맞이하면,
설전곡기사(設奠哭其死)
제사를 차리고 죽음을 서러워 한 답니다.
부혹곡기자(父或哭其子)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곡하기도 하고,
자혹곡기부(子或哭其父)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곡을 한답니다.

이 시(詩)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며 삶과 죽음이 우리 역사의 어느 한 굽이에서 몰아쳤던 동래읍성 전투의 실화를 담은 피 맺힌 시 다.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허물어진지 133년만인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성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곽 공사를 시작했다.

성을 쌓는 중에 임진왜란 때 전사한 많은 유해를 발견해 동래 내성중하교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금강공원으로 이전했다. 모두가 임진년 4월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동래사람들의 영혼이 합장된 무덤, 임진동래의총(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이다.

매년 음력 9월9일에는 동래시장번영회에서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낸다. 2000년대 들어서도 유해는 계속 나왔고, 특히 지하철 4호선 동래 수안동역사 자리는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의 남문 앞 해자(垓字,못)터였다.

2005년도 도시철도 4호선 수안동역사를 지을 때 구멍이 뚫린 채 발견된 두개골부터 창검에 베어진 흔적이 역력한 시신들, 비늘 갑옷, 나무 자루까지 붙어 있는 긴 창, 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던 깍지, 화살촉 등 전투에 사용되었던 무기들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당시 공사를 중단하고 많은 유골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수안 역 구내에 설치된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은 당시의 참상을 유물과 영상으로 잘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수 십 미터 지하에는 아파트 때문에, 차가 다니는 도로 때문에 수습하지 못한 유해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년 동래읍성 전투에 동래사람 천 명 백 명 중에 한둘만 살아남았다고 했으니 동래사람 다 죽은 거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동래 땅 지하 곳곳에 순국선열의 한 맺힌 영혼이 속울음을 삼키면서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하늘도 무심하게 지하에 묻혀 있다.

동래는 성지(聖地)다. 그래서 동래 땅을 밟을 때는 발꿈치 들고 조심조심 다녀야 한다. 응당 그래야 마땅하다.

1592년 임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의 영령을 모시는 사당이 충렬사(忠烈祠)다.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공을 받들기 위하여 송공사(宋公祠)를 지어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렬사가 확장된 것은 1976년11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만평이 넘는 넓은 부지로 크게 확장하였다.

충렬사 경내에는 송상현공의 명언이 새겨진 ‘전사이가도난(死戰易假道難)’ 즉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는 비가 세워져 있다.

충렬사는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 소중한 곳이다. 오늘날 충렬사는 역사유적지뿐만 아니라 부산 시민들에게 문화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매년 5월25일 부산광역시 주관으로 호국선열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황성창 시인
재부군위군의흥면향우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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