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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뜸 베 질

admin 기자 입력 2020.06.03 22:32 수정 2020.06.03 10:32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변덕이 심한 여름. 맑은 하늘에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
사방이 어두컴컴해지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지면서 하얀 먼지를 일으킨다. 지나가는 소낙비라도 잠시나마 한낮의 무더위를 식혀 준다.

우리 집은 각자 다른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아버지는 일상을 총괄하며 지휘 감독을 담당하시고, 나는 소죽을 끓이고 풀 베고 소먹이는 일을 담당한다.

학교 다녀오면 으레 또래들과 같이 앞산에 매어둔 소를 몰고 풀 뜯어 먹이러 산으로 간다. 코뚜레에 매인 이까리를 뿔에 감고 풀어놓으면 소들은 풀을 뜯어 먹으면서 한걸음에 산꼭대기까지 오른다. 우리들은 기마전 말타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날이 저물고 어둑어둑할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

동네에 황소 있는 집은 우리 집뿐이다.
황소는 거세고 다루기 힘들다고 대부분 집은 암소를 키운다. 우리 집은 농사일하는 대는 힘이 세어야 한다며 황소를 키운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황소와 같이 지내왔기 때문에 무서움을 남보다 적게 탄다. 동네 소들과 같이 산에 올려놓으면 우리 소는 암소 엉덩이 냄새 맡느라고 풀을 뜯지 않고 서성인다. 먼 데서 바라보면 속 상고 화가 난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돌아올 때쯤 암소들은 배가 부른데 우리 소는 홀쭉하다. 걱정된다.

이대로 가면 소 먹이러 보냈더니 소가 풀을 뜯는지 안 뜯는지도 모르고 종일 뭐 했나 하며 아버지한테 야단맞는다. 이를 때면 소를 붙들고 풀이 많은 데로 끌고 가서 뜯긴다. 황소는 암소와 달라 뱃구레가 적어 금방 배가 불러온다. 이렇게 해서 같이 내려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소 먹이러 산으로 갔다.

소들이 한창 풀을 뜯고 있는데 난데없이 낯선 황소 한 마리가 끼어들었다. 소들은 풀을 뜯다 말다 눈을 둥그렇게 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우리 소가 황급히 달려왔다. 쌕쌕거리며 뿔로 낯선 소의 엉덩이를 들이받았다. 그 소는 머리를 획 돌리며 우리 소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소가 밀리는 것 같았다. 결국, 물러서고 도망쳤다. 암소를 거닐지 못하고 도망친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한테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소죽 끓일 때마다 콩을 한 줌씩 더 넣고 등겨도 더 넣어 끓였다. 소죽 끓는 냄새가 어느 때보다 향긋했다.

소죽을 양동이에 불룩 떠주어도 금방 다 먹어버렸다. 또 더 주고 했다. 겨우내 그렇게 해주었더니 소는 몰라보게 살찌고 힘도 세 보였다. 어느덧 싱그러운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면 생각난다. 지난해 우리 소와 싸움했던 그 황소. 올해도 그 소가 오기를 바랐다. 지난해 서러움을 씻기 위해 싸움을 한번 붙여보고 싶어서였다.

누가 부르는 듯이 작년에 왔던 황소가 또 왔다. 우리 소가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히 다가갔다. 그 녀석도 공격할 자세를 취하며 몸을 한껏 낮춘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어떻게 하든 이번에는 꼭 이겨야 한다는 오기가 났다. 두 마리는 괴성을 지르며 공격할 틈을 노렸다.

우리 소가 상대 소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뿔이 부딪치는 소리가 타닥거리며 요란했다. 소들은 서로가 밀리고 밀었다 하며 온 힘을 다한다. 상대 소의 숨 쉬는 소리가 가쁘고 거칠게 들렸다. 이때다. 싸움은 속전속결이라 했다.

소 곁에 가서 ‘우리 소 이겨라. 밀어 붙어라’하고 응원했다. 응원 소리에 힘을 얻은 우리 소는 상대 소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고 연속적으로 공격했다.

상대 소는 머리를 흔들며 줄행랑치듯 도망갔다. 우리 소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내 곁으로 돌아온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으로도 그 녀석을 여기에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한다며 다독여 주었다. 싸움은 이기려고 하는 것이지 지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태까지 속상했던 것이 풀리고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렇다고 만족할 것만 아니다. 어쩌면 불쌍하기도 하다. 도망친 녀석은 산 넘어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녀석은 뜸베질한다는 소라고 동네에서 ‘왕따’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암소 찾으러 온 사방을 뛰어다니는 것도 모르고 십 리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녀석을 싸움을 시켜 쫓아 보냈다. 내 마음인들 오죽하랴.

생각지도 않던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평소와 다름없이 소죽을 주는데 순둥이 같은 황소가 갑자기 뜸베질하며 난폭해졌다. 엉겁결에 양동이를 내던지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아버지는 저 녀석이 죽으려고 마음 변했나? 잘못하다 사람 다치겠다. 하시며 소 장사한테 갔다. 무지의 소치였다. 소는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소들도 순정과 애정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다. 소들의 청각과 후각은 대단히 예민하다. 황소는 1㎞ 밖에서 우는 암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발정인지 새끼를 찾는 소리 인지 구분할 줄 안다.

발정한 암소의 울음소리 듣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황소를 붙들어 매었다. 황소는 애달파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정신없이 날뛰었다. 주인도 모르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구도 못 말렸다. 가까이 가면 콧바람 소리 내면서 뜸베질하며 달려들었다.

황소들의 애정표현도 모르고 무척 대놓고 묶었던 것이 내 잘못 이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소낙비 한줄기가 답답하던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 것 같았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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