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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참았던 울분

admin 기자 입력 2020.06.17 22:05 수정 2020.06.17 10:05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늦겨울. 봄이 왔어도 봄이 온 줄 모르고 뭉그적대고 있다.
양지바른 산에는 새싹들이 얼어붙은 땅을 헤집고 봄소식을 전한다. 긴 잠에서 깨어난 산수유도 가지마다 눈곱을 주렁주렁 매달고 봄을 마중한다. 개나리 목련들도 가쁜 숨 몰아쉬며 뒤따른다.

산은 정직하고 거짓이 없다. 숨김없이 가진 것 그대로 보여 준다. 매서운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면 북적이든 산은 숨죽은 듯 조용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재잘거리든 산새 소리며 향기를 자랑하든 꽃들이며 더위를 식혀주든 산들바람 모두가 간 곳이 없다.

철 따라 변하는 산의 풍경은 아름답다. 청매산 철쭉이 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나가 버린다. 녹음이 짙은 산속에 뻐꾸기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울긋불긋 단풍이 사람의 마음을 휘저으며 잠시도 가만히 두질 않는다.

화려한 무대를 꾸미느라 정신없던 산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하얀 솜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산들의 풍광에 정신 잃고 방황한다. 하얀 눈가루가 휘날리고 천지가 고요 속으로 빠져들 때면 더욱더 그러하다.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는 어느 가을. 친구들이 등산 가자고 한다.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이다. 그런데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거절할 수 없다.

한 친구가 아무런 준비를 하지 말고 따라오면 된다는 그 말을 고지 듣고 그냥 따라나선다.
친구들은 배낭이 터질 것같이 해서 걸머메고 나온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측은한 감마저 든다.

따가운 가을 햇살이 넘실거리며 온몸을 파고든다. 어릴 적에 산을 쉽게 오르내리고 했던 것을 생각하며 올라간다.

체력이 예전만 같지 않다. 숨이 차고 땀이 옷을 조금씩 적시며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칡넝쿨과 억새가 한데 뒤엉켜 등산로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럽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우리는 숲이 우거진 산 중턱 몇 평 남짓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강렬한 햇볕에 산천은 녹초가 되었다. 산새들도 더위에 지쳐 입을 벌리고 헐떡거렸다. 시들어진 풀과 나뭇잎에서 뿜어내는 풀냄새는 어린 시절 때 맡아보았던 그 냄새와 똑같았다. 세상은 변했는데 이것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올까 말까 망설여지던 생각이 달아나고 같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내리고 사방은 부스럭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적막감마저 들었다.

우리가 떠드는 소리만 메아리쳤다.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 부르며 캠프파이어도 하고 양주랑 양담배랑 피우고 마시며 밤새껏 즐겼다.

산은 속도 없고 화도 낼 줄 모를까? 철딱서니 없이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떠들어 댔어도 아무 말이 없다. 사람들이 산을 오르내리며 못살게 굴어도 싫어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는다. 억센 등산화로 마구 짓밟고 다녀도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않는다.

나무며 꽃이며 수석 등 닥치는 대로 꺾고 캐고 가져가도 말없이 묵묵 바라보고만 있다. 오히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며 계절 따라 화려한 무대를 꾸미며 기쁨을 더해준다.

그러면서도 겸손함은 더할 수 없다. 산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도 높은 체하지 않는다. 잘난 척도 허세도 부리지 않으며 으스대지도 않는다. 산을 볼 적마다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산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모두에게 희망을 주면서 삶의 터전과 안식처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산에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담뱃불을 버린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도 담뱃불을 마구 버린다. 담뱃불로 산이 화염에 휩싸여 시커먼 잿더미로 변한다.

한순간 사람들은 집과 재산 잃고 거리로 내몰린다. 비참한 참상을 볼 수 없다. 산은 참을 수 없는 굴욕에 끝내 울분을 삼키지 못하고 화산 폭발로 시뻘건 용암을 쏟아낸다.

결국, 터지고 말았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폼페이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이 뜨거운 화산재에 타 죽은 모습을 진흙으로 만들어 놓았다. 목욕탕 술집 마차가 다녔던 바퀴 자국 등의 생활화도 만들어 놓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금방이라도 검은 연기와 뜨거운 화산재가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폼페이가 무슨 죄가 있었기에 아름다운 도시를 이렇게 흔적도 없이 뭉개 버렸을까? 폼페이의 최후를 보면서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에 대한 산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진 것 같았다.

멀쩡했던 산이 하루아침에 상처투성이로 변했다. 산업화로 명당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내고 묘지를 만들고 하며 마구잡이로 산을 파헤쳤다. 잔설이 녹기 전 이른 봄에 사람들은 고사리 더덕 등 산나물 뜯으려 산을 올랐다.

산은 기겁하고 몸을 도사렸다. 나물만 뜯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로 뿌리째 뽑아 갔다. 낙엽으로 덮어있든 산은 속살을 드러내며 군데군데 포격을 맞은 듯했다.

울창한 산림은 자취를 감추고 아름답든 산은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산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쓰라림으로 참았든 울분을 삼키지 못하고 끝내 쏟아 냈다. 언제쯤 누그러질까?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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