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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과연 북한에 바랄 게 있을까

admin 기자 입력 2020.06.17 22:06 수정 2020.06.17 10:06

↑↑ 황성창 시안
ⓒ N군위신문
해마다 6월이 오면 전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6·25전쟁이 일어났고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현충일도 6월6일이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로런스 비니언의 시‘전몰자를 위하여’ 중 일부 시구(詩句)가 떠오른다. ‘살아남은 자는 늙을지라도 님들은 결코 늙지 않으리, /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도 피곤치 아니하고 비난하지 않으리라 / 해 뜨는 아침이나 해 저문 밤에도 님들을 항상 잊지 않으리.’ 잊으려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6·25 그날을, 어느새 70년 세월이 흘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를 가로 지르는 38선 전역에서 선전포고도 없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남침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이에 미국은 6월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묵살하자 6월 27일 유엔은 안보리결의로 유엔군의 깃발을 들고 6·25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동시에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도 연합군사령관 겸 초대 유엔군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폭격권한을 부여했다. 유엔의 이름으로 군대를 파병한 16개국을 포함 63개국이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을 도와 준 경우는 유엔 창설 이후 2020년 현재까지 6·25전쟁 때가 유일무이하다.

6·25전쟁은 국제전이었다. 핵무기만 제한되었을 뿐 세계대전이나 다를 바 없는 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한반도에서 국군과 유엔회원국 21개국이 참전하고 북한군을 지원한 소련과 중공군의 무력개입으로 무려 24개국의 군인들이 치열하게 치른 전쟁도 흔치 않다.

불시의 기습으로 전쟁초기 우리 군은 낙동강 최후방어선까지 밀리는 악전고투를 면치 못했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을 때 미국을 위시한 맥아더 장군 휘하 유엔군의 즉각 대응과 반격으로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이어 적군의 후방을 파고든 역습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일시에 전세를 뒤집었다.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몰아붙여 서울을 수복하고, 여세로 38선을 넘어 북진하며 패주하는 북한군을 뒤쫓아 압록강 근처까지 점령했다. 1950년 10월 1일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에게 항복하기를 요구했다.

패전을 목전에 둔 김일성은 모택동에 원군을 청해 중공이 11월 6일 참전을 포고하고 40만 대군의 인해전술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중공군의 반격으로 1951년 1·4후퇴 때 중공군 12만 명이 쳐놓은 매복(埋伏)작전에 걸려든 미 해병대는 장진호전투에서 미 전사(戰史)에 영원히 기억될 영하 30도 혹한에서 17일간의 사투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기사회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흥남철수작전 때 생지옥 같은 혼란 속에서도 미군은 함정에 실어야할 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북한 피난민 10만 명을 태워 남쪽으로 데리고 왔다.

이후 1951년 1월부터 시작된 휴전협상은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2년여 협상에 난항을 거듭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다.

6대주에서 온 수많은 유엔군의 젊은 영웅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년간의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은 채, 38도 휴전선은 남북을 가로 막았다.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마무리되면서 남북은 각기 다른 체제와 사회로 확연히 이질화 됐다. 평화통일이 지상 목표였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고 대결적 갈등양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소리 없는 전쟁은 계속되었다.

휴전협정 이후 전란으로 상처 받은 민족상잔의 원한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화해를 위한 숱한 노력을 기우려왔다.

첫걸음으로 박정희 정권 때인 1972년 7월 4일 분단이후 남·북 간 최초로 자주, 평화, 민족의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 7·4 남북공동성명을 깜짝 발표했다.

그 후 노태우 정부도 1991년 12월 13일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31일에는 핵무기의 생산, 보유금지를 골자로 하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문도 발표했다.

또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도 북한 김정일과 2000년 6·15 남북공동선문을 발표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 국제적 정치지도자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남북이 평화공존을 위한 합의문이나 공동선언문을 수차례나 발표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2002년 연평해전을 일으켰고, 2006년에는 핵실험을 강행하고 핵보유국임을 선언함으로써 남·북 간에 어렵게 이룬 모든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 뭉개버렸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도 김정일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공동성명문에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 발생했고, 2010년 4월에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이어 핵실험 등의 대남 도발이 계속 이어져 왔다.

휴전협정이후 67년이 지났지만, 남북관계는 묶인 실타래를 하나 풀지 못하고 한반도는 냉랭하다. 근 70년을 반복되어 온 북한과의 관계가 답보상태임에도 문재인 정부에서는 북한에 매우 우호적이다.

현 정부 들어 한·미공동의 대북협상 전략목표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를 이룰 듯 속전속결로 2018년 4·27판문점 선언에 이어 9·19 남북군사합의까지 이끌어 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재(嶺)너머 마실가듯 판문점에서 환하게 웃으며 만났다.

남·북 사이에 평화가 금방이라도 올 듯이 온갖 장밋빛 구상들을 쏟아냈다. 문화예술인들이 손잡고 오가며 웃던 모습들이 마치 내일이라도 통일이 될 성 싶었다. 그토록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6·25전쟁이 터진 통한의 6월에 얼음장처럼 굳었다.

북한이 대북인권단체들이 뿌린 전단 살포를 문제 삼아 남북통신선을 차단하고 대한민국 자존심을 건드리는 횡포를 보자니 마치 똘마니들을 보는 것 같다. 휴전협정 이전 남침 전쟁의 대결 구도로 되돌아가겠다는 심산인지 오만방자하다.

김일성이가 권력을 탐해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남북은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다. 쉽게 끝나질 않을, 어느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 같은 체제경쟁은 70년이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이제라도 굴욕적 대북 유화정책을 중단하고 현실적이고 국민이 동의하는 원칙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해줬으면 한다. 대한민국의 품격에 맞는 존엄과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꽃다운 청춘을 바쳐 나라를 지켜온 한(恨)많은 영령들의 영전에 엎드려 명복을 빈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는 일은 산 자의 몫이다.

전사자에게 진 빚은 온전하게 되갚을 수는 없다. 되갚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영령들의 넋을 기억해야하고 헌신에 보답해야한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젊음을 불사른 영렬들과,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소중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전몰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국가가 전몰자에게 갖추어야할 최소의 예의고, 국가가 존재하는 의미이고 최소한 근거다.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어둠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당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한 당신의 희생과 헌신을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황성창 시인
재부군위군의흥면향우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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