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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8)

admin 기자 입력 2020.07.02 16:24 수정 2020.07.02 04:24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세조는 단종과 깊은 관계가 있거나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인사들은 비록 친 형제간이나 종친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처형하였다 친동생 금성대군 이유(李瑜1427~1457)는 순흥에 유배시키고 출생한 지 3일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친자식 같이 애지중지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양씨는 함양으로, 혜빈양씨의 소생 한남군과 영풍군은 금산에 유배시켰다.

세조는 그들을 다시 아산으로 이배시켰다가 그곳에서 사사시켰고 세종의 서자인 왕자 화의군(和義君1425~?)은 금산으로 유배하였다가 처형하였다.

이상과 같이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수많은 충신들과 형제들을 처형한 세조는 이후에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반교문(頒敎文)을 발표하고 수천 명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석방이다.

세조는 매월 1일, 12일, 22일을 상왕 단종을 알현하는 날로 정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위엄을 갖추어 창덕궁을 찾았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세조의 행차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에 “숙부님 국정도 바쁘신데 앞으로는 창덕궁 행차를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사양하며 세조의 알현을 거절하였다. 단종이 세조를 겁내며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병자사화(사육신 사건 세조2년 1456년)가 일어났으니 단종으로선 좌불안석이었다.

세조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어린 상왕을 그대로 두지 않고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강망경, 우의정 정창손 등이 중심이 되고 좌찬성 황수신, 우찬성 신숙주, 호조판서 이인손(李仁孫), 이조판서 권람, 병조판서 홍달손 등이 협력하여 상왕을 그대로 두면 병자사화와 같은 역모가 끊이지 않을 것이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특히 정인지, 신숙주 등은 세조에게 “전하 비록 친부자간이라도 역모와 연루되었을 때는 내쫓아야 하거늘 조카라고 두둔하신다면 종사에는 누가 된다며 상왕을 멀리하라고 청하였다.
세조는 중국에 정통제(正統帝)의 고사(故事)가 있다며 경들의 주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정통제는 명나라의 제 6대 황제로 1449년 (세종31)오이라트(Oirat몽골계 부족)족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그 사이 명나라 조정은 정통제의 이복동생을 제7대 황제 경태제(景太帝)로 옹립하였으나, 1450년(세종32) 오이라트와 명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됨으로써 정통제도 풀려나게 된다.
정통제는 태상황제가 되어 유폐되었으며 명나라 조정은 정통제 파와 경태제 파로 나뉘었다. 그해 세종은 죽음이 가까워지자 문종과 수양을 불러, 명나라의 일을 들며 외부의 이간질로 형제간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도록 유언하였다.

세조는 조카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지만 선왕 세종의 뜻이 마음에 걸렸는지 신하들에게 정통제의 예를 들며 단종의 유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정인지는 굴하지 않고 거듭 상왕 단종을 멀리 보낼 것을 청하였고 세조는 단종의 시종(侍從)을 줄여 단종 복위 운동 때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의 집으로 나가 살도록 하였다.
하지만 영의정 정인지는 그해 2월 백관을 거느리고 단종을 도성 밖으로 쫓아 낼 것을 청하였지만 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종의 입장을 어렵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한양 서강(西江)에 사는 김정수는 권세가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풍수도 보고 점도 치는 등 떠돌이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누이가 송현수 (단종의 장인)의 집에서 참모로 있다가 쫓겨나자 앙심을 품고 김정수는 예문관 제학 윤사흔(尹士昕)을 통하여 단종의 장인 송현수(宋玹壽)와 돈령부 판관 권완(權完)이 역모를 꽤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세조는 윤사흔과 김정수에게 술을 하사하고 즉시 대관을 궁으로 부르는 한편 의금부에 명하여 판돈령부사 송현수, 판관 권완을 잡아오라 하였다.
세조는 사정전(思政殿)에 나가 삼정승과 판서 승지 등을 불러 송현수와 권완의 역모를 알렸다.

세조는 은근히 상왕과 대비, 송현수의 부인 민씨도 같은 죄임을 비추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을 여러 신하들에게 암시하였다.
세조는 송현수에게 “네가 역모를 할 때에는 상왕과 통모를 하였겠다.”라며 확인 차 묻자 송현수는 역모 모의에 자신이 포함된 줄도 몰랐는데 어찌 상왕이 아실리가 있냐며 부정하며 상왕까지 죽이려는 것은 불충일뿐더러 골육상잔이니 죽음은 자신들에게서 끝나야 할 것이라며 송현수와 권완은 끝내 죄를 자복하지 않았다.

다음날 송현수와 권완을 비롯한 가족들은 형벌을 받았으나 세상에서는 역모에 대한 날조된 사건이라고 전하였다.

이 사태를 계기로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결국 영월로 유배되고 말았다 계유정난이 의정부 대신들을 죽이고 왕위찬탈에 시발점이 되었다면 단종복위 실패와 단종의 장인 송현수의 역모사건은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 보내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고 금성대군(1427~1457)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 복위 실패는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죽음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성대군이 순흥(順興)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순흥 부사로 이보흠(李甫欽?~1457)이 부임하였다.

이보흠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를 지낸 사람으로 관향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경부(敬夫)호는 다전(大田)이었다.

이보흠은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있다가 발탁되어 순흥부사로 오게 되었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단종의 이야기만 나오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보흠은 뛰어난 재주에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로 글도 잘하였으나 강경한 뜻을 지닌 선비 일뿐 대사를 지휘할 큰 인물은 못되었다.

이보흠과 금성대군은 서로 자주 만나는 동안 금성대군의 의분과 충성에 감동받아 저녁이 되면 평복 차림으로 금성대군을 찾아가 밤늦도록 영월에 유배된 단종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서로 뜻이 통함을 알자 기뻐 눈물을 흘리며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이보흠에겐 부사로서 3백여 명의 군사와 70여명의 관졸을 지휘할 권력이 있으니 맨주먹 밖에 없던 금성대군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금성대군으로서는 부사 이보흠을 중심으로 유배지의 군사와 향리(鄕吏)를 결집시키고 경상도 안에 있는 양반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금성 대군이 자신의 갓에 달려 있는 산호로 만든 구영자(鉤纓子 갓 끈을 다는 고리)를 떼어 이보흠에게 주자 그는 큰 절을 하고 영자(纓子)를 받으면서 목숨을 바쳐 금성대군을 따를 것을 맹세하였다 .

하지만 1457년 9월 두 번째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는 어이없게도 금성대군을 오랫동안 수발을 들던 금연이라는 몸종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관노에 의해 실패 하게 된다.

관노는 공명심이 많은 위인으로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 매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자신이 모시는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어떤 음모를 꽤하고 있음을 눈치 채기에 이르렀다 금성대군을 모시던 금연을 불러내어 너의 주인어른이 큰 역모를 꾸미고 있으니 잘못되면 너 역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것이니 주인이 쓴 문서를 찾아 관아에 밀고하자며, 이보흠의 관노가 금연을 부추기자 금연은 큰 상을 받고 잘 살아 보자는 관노의 꼬임에 넘어가 금성대군이 잠든 틈을 타 격문을 훔쳐 이보흠의 관노에게 주었다.

문갑 속에 넣어둔 격문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 한나절쯤 되어서야 알고 난 후 금연을 잡아 추궁을 하자 금연이 실토를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보흠은 기천현감 김효흡(金孝洽)에게 금성대군과 이보흠연명으로 된 편지를 보내어 격문을 훔쳐간 관노를 잡아 오도록 하였다.

김효흡이 편지를 받아 본 즉시 죽령제를 향해 뒤를 쫓았고 장호원 음죽(陰竹경기도 이천)에서 이보흠의 관노를 붙잡았다.

김효흡이 관노에게 격문을 빼앗아 읽어본 뒤 찢어버리려 하자 이보흠의 관노는 격문을 찢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며 김효흡을 회유하였다.

관노의 이야기를 들은 김효흡 또한 이런 기회에 공을 세우고자 이튿날 한양에 도착하여 판중추원사 이징석(李澄石이징옥의형)을 찾아가 그를 통하여 세조에게 격문이 올려 졌고 격문을 본 세조는 곧바로 영의정 정인지를 불러 금성대군을 비롯한 반역자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하고 대사헌 김순(金淳)과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정5품) 김수(金修)를 순흥으로 파견하여 금성대군을 국문하게 하였다.

한편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김효흡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수십 장의 격문을 쓴 다음 예천을 거쳐 안동까지 붙이게 하고 동지를 규합해 거사하기로 했지만 격문이 안동에 닿기도 전에 예천과 안동의 군사 500여 명이 안동부사 한명진(한명회의 6촌형)의 지휘아래 순흥을 급습하였다.

관군의 습격으로 순흥고을은 불바다가 되고 피바다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한명진의 손에 붙들려 안동으로 호송되었고 옥에 갇힌 지 며칠이 못되어 교살 당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종말을 내렸다.
(다음호에 계속)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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