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신 줏 단 지

admin 기자 입력 2020.09.01 23:01 수정 2020.09.01 11:01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어둠이 깔리고 세상 숨 쉬는 소리가 멈춘다.

빛바랜 의자에 걸터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긴다. 풍진 세월 속에서 힘의 한계를 느끼며 나만의 공간에서 신을 섬기며 내 모든 것을 신에 의지하려 한다.

어머니는 대청마루 한구석 높은 곳에 신줏단지를 모셔놓고 집안의 가호신 것처럼 소중히 여긴다. 우환과 재앙을 없애고 재물을 지켜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맹신주의자는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독실한 불교 신자다.

그러하면서도 소중한 기회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가 있다. 집안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신줏단지 앞에 무릎 꿇어 축원하고 빌고 한다.

추수가 끝나면 손 없는 날을 택일하여 일 년 내 단지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씻고 닦고 한다.
지난해 단지에 넣었던 묵은쌀을 비우고 올해 수확한 햅쌀로 가득 채운다. 단지 주둥이를 창호지로 덮고 타래실로 정성스레 묶은 다음 제자리에 모셔놓는다.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가 되면 어머니는 이른 새벽 신줏단지 앞에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정성을 다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한다.

가족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머니의 숭고한 삶의 참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신줏단지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켜 주셨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밤, 우리 가족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배를 움켜쥐고 쭈그리고 앉아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해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온몸이 떨리고 땀은 비 오듯 했다. 통증과 싸움에 점점 몸이 힘들어 왔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나를 보고 온 식구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식구들이 나를 부르고 흔들어도 꼼짝할 수 없었다. 당황한 식구들은 어찌할 바 몰라 허둥지둥 대며 야단법석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한테 귀신이 들었다 하며 객귀를 물리신다. 신줏단지 앞에서 주문을 외우신 다음 부엌으로 가서 바가지와 식칼을 들고나오신다.

내 머리맡에 조용히 앉으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식칼을 내 머리 위로 썩썩 서너 번 오가고 하신다. 바가지와 식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신다.

귀신아! 물러가라 하면서 칼을 세 번 던지시고 마지막 세 번째 던진 칼이 선 땅 위에 칼로 십자를 긋고 거기에 칼을 꽂고 칼 위에 바가지를 덮어씌우고 방으로 들어오신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섭고 벌벌 떨렸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 후 견디기 힘들었던 복통이 거친 폭풍이 지나간 듯 금방 가라앉았다.

어머니의 믿음이 일으키신 기적이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정성 어린 기도에 신줏단지가 들어주셨다고 믿었다.

죽어가든 동생을 살리신 어머니의 기적에 놀란 형제들은 신의 신비함에 감탄했다. 우울했던 온 가족은 불안했던 밤을 떨쳐버리고 즐거운 밤을 보냈다.

구석에 있는 신줏단지는 언제나 외롭고 쓸쓸하다. 기껏 찾는 사람이라고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 병들고 힘없는 나약한 사람 등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사람들뿐이다.

그런데도 신줏단지는 사람들에게 언짢게 대하거나 찡그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웃는 모습도 볼 수 없다. 말없이 묵묵히 앉아있는 신줏단지 모습에 나도 몰래 눈길이 끌려간다.

어머니의 기도는 끝이 없었다. 어느 여름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종일 끝일 줄 모르고 내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듯 줄줄 흘러내렸다.
우리 집 앞에는 큰 산 물줄기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고 뒤에는 작은 산에서 내리는 작은 도랑이 있다.

큰비가 오면 언제나 걱정이 되었다.
오늘따라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결국, 집 뒤에 있는 작은 도랑에 황토물이 꽉 차 흐른다. 비가 조금만 더 내리면 물이 금방이라도 방으로 쫓아 들어올 기세를 하고 있었다.

비는 계속 퍼부었다 그쳤다 하며 사람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앞 도랑에 흘러가는 물소리가 천둥을 치며 내달렸다.

황토물이 수챗구멍을 통하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마구 쫓아 들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 마당에 황토물이 가득했다. 뜨락까지 물이 찰랑찰랑했다.

마구간에 있는 소는 물이 차 들어오자 눈을 부릅뜨고 우왕좌왕했다.
어머니는 비에 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신줏단지 앞에 꿇어앉아 주문을 외운다. 그러고 나서 대청마루 끝에 서서 두 손을 합장하여 하늘을 보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절을 하고 있었다.

세차게 퍼붓던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 가렸던 파란 하늘이 수줍은 듯 얼굴을 살며시 내밀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안쓰럽고 애틋하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티끌만도 못하게 살아온 나를 돌아보면서 죄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세월의 무게를 이겨 낼 수 없었던지, 어머니께서는 일흔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신줏단지도 떠났다. 외로움과 서글픔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오롯이 혼자 느끼고 견뎌 내어야 했다. 신줏단지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 줄 것으로 믿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두고 떠나가셨지만, 난 해 놓은 것 없이 자식들을 위해 무엇을 남겨놓고 떠나야 할지 고민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