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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지붕 위의 암소

admin 기자 입력 2020.09.20 22:22 수정 2020.09.20 10:22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지루한 장마, 두어 달 넘게 계속되었다. 많은 비를 뿌리며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6월에서 시작한 장마는 태풍을 동반하며 8월까지 내렸다. 집이며 농경지며 축사 등 모두가 물에 잠기고 폐허가 돼버렸다.

재앙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이 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지원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중국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비드 19) 재확산으로 자원봉사단체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거기에 제8호 태풍 바비(Bavi)까지 한반도를 통과한다는 소식에 엎친 데 덮친 격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태풍 바비는 베트남 바비 산맥의 이름이다. 수마에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수재민들은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폭우가 며칠째 계속되었다. 강물은 무섭게 불어 올랐다.
북한의 황강댐, 연천의 군남댐, 충주댐 방류로 서울의 상수원 팔당댐이 위험 수위에 육박했다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팔당댐이 많은 양의 물을 한꺼번에 저장하기는 역부족했다. 수문 일부를 개방했다. 서울시는 갑작스레 불어난 물로 물난리를 겪었다. 잠수교 등 차량 통행이 전면 통제되었다.

이번 비는 서해지방에 많이 내렸다. 특히 구례, 목포, 하동 등 지역에는 더 많이 내렸다. 섬진강 제방이 터졌다. 전남 구례읍 곳곳 마을이 순식간 물에 잠겼다. 주민들은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마구간에 있던 소들은 나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들은 흔히 ‘덩칫값도 못 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소를 두고 한 말이다. 소의 성격은 내성적이며 소심하다. 덩치는 커 보이지만 겁이 많다. 부스럭 소리만 나도 놀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면서 호기심은 많아 물러서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집중하는 성격도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둔하고 미련한 소들이 어떻게 마구간을 빠져나왔을까? 시뻘건 흙탕물이 마구간 안으로 쏜살같이 빨려 들어가듯 한다.

발목까지 채웠던 물이 금방 배까지 차올랐다. 사람 같았으면 ‘사람 살려’하며 고함쳤겠지만, 말 못 하는 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차오르는 물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주인은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소는 육중한 몸이라지만 종잇조각보다 가벼웠다. 물 위에 그냥 둥둥 떠 있었다. 물살이 치는 데로 이리저리 따라 휩쓸렸다.

소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죽음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눈빛만 봐도,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음성만 들어도 주인인 줄 알고 반가워 머리 흔들며 애교 부리던 정겨운 소였다.

몇 시간 후면 영영 이별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이별은 슬프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믿었던 나였다. 그것이 현실로 나에게 닥쳤다. 착잡한 심정 가눌 때 없어 하늘 보고 애원도 했다.

헤엄칠 줄 아는 말과 모르는 소가 강물에 빠졌다. 말은 지혜와 힘만 믿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다 힘에 지쳐 죽었다.

소는 물살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다 강기슭에 닿아 살아났다는 우생마사(牛生馬死)란 고사성어가 있다. 그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이번 홍수로 합천 황강에서 80km 떠내려간 암소가 사흘 만에 밀양 낙동강 기슭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마침 소귀에 이력 표가 달려 어렵사리 주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말보다 소가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들수록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소는 마구간에 가득 찬 물에 붕 떠 물살에 휩쓸려 서서히 문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세상천지가 노아의 홍수 때처럼 물에 잠겨 버렸다.

보이는 것이라곤 사람을 집어삼킬 듯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는 흙탕물뿐이었다. 때론 보일락 말락 한 희미한 지붕이었다.

그것마저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소는 필사적으로 지붕 위에 올랐다. 그때의 소의 심정은 어땠을까. 제아무리 담력이 세다 해도 혼이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 소의 투혼에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소는 오직 살아야 했다. 비가 조금만 더 오면 거센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야 할 절박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소가 떠내려가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가 차츰차츰 약해졌다. 나뭇가지가 보이고 새도 한 마리씩 날아다녔다. 지붕도 보이고 전봇대도 보였다.

강둑을 넘쳐흐르던 물이 서서히 빠졌다. 소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네 다리로 지붕 위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장비를 동원해 지붕 위에 있는 소를 무사히 내렸다. 소는 저항도 없이 순순히 자기 몸을 사람들에게 맡겼다. 무사히 땅을 밟았다. 굶주린 배에 긴장 초조 공포에 지친 소는 힘없이 쓰러졌다. 주인의 지극정성으로 소는 다시 제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다.

두어 달가량 끌었던 장마도 많은 생채기를 남기고 물러났다. 소는 생명의 은인인 주인에게 쌍둥이 새끼를 낳으면서 은혜를 베풀었다. 어미 소도 건강하고 새끼도 건강했다.

천진한 새끼는 꼬리를 하늘로 쳐들고 어머 젖을 힘차게 빨고 있었다. 소는 말 못 한다는 것뿐이지 사람보다 못한 것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어렵게 태어난 송아지가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원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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