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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군위군에는 최고·최초는 없을까?

admin 기자 입력 2020.09.20 22:25 수정 2020.09.20 10:25

↑↑ 홍영선 연구원
ⓒ N군위신문
대구·경북 한뿌리 상생위원회에서 상생협력과제의 일환으로 ‘대구·경북연구원’에서 편집 간행한 『대구·경북 최고·최초를 찾아라』란 책을 연구원에서 보내와 읽어보고서, 내고향 군위군과 관련된 내용이 1건도 없었다.

다만 경상북도에서 설치하여 2007년 3월에 개강한 <경북농민사관학교>가 전국유일의 농업전문교육기관이 군위에 있다고 소개 되었다.부록으로 시·도민 제안자료 147건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군위군 관련 응모명은 ①가장 아름다운 화본역(조태웅) ②,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스토리텔러 일연스님(김동엽) 이상 2건 중에도 일연스님은 군위 인물로만 특정할 수 없으니 결국은 ‘화본역’ 하나 뿐이었다.

그렇다면 군위군에는 최고·최초가 없다는 것일까? 군위 공직자가 여기에 관심이 없어 자료제공을 하지 않아서 일까? 군위군민에게 자문 자답해 보면 답이 보일 것이다. 필자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만을 나열해 본다.

1) 전국 최초의 항마촉지인 삼존석굴암

부계면에 있는 ‘삼존석굴’은 국보제109호로, 자연암벽을 뚫어 서기700년경에 만든 석굴암으로 불상의 민머리에 상투처럼 돌기한 살의 혹인 육계형, 큰얼굴과 근엄한 표정이 서린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성초기 채색 흔적이 남아있다.

중국 당나라 양식인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에서 볼 수 있다. 이석굴은 암벽속에 불상을 안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으로 경주 석굴암 보다 50년 이전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굴사원으로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국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2) 전국최초의 왕희지 글씨 집자集字한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

고로면 인각사 경내 ‘보각국사탑과 보각국사비’(보물제428호)가 있다. 이비는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스님(1206-1289)의 부도탑과 그탑의 비문이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보각국사비와 정조靜照지탑이 세워졌다.

국사비는 충렬왕 21년(1295) 국사의 불제자인 청분에 의하여 세웠으며, 비문은 당시 최고의 문장가인 민지閔漬(1248-1326)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장이고, 글씨는 왕명에 의하여 죽허竹虛스님이 중국 동진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3-361)의 유필을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이 비는 전국 최초의 왕희지 집자체 비문으로 유일한 것이다.

3) 도내 최고 오래된 대성전 선성위패先聖位牌

‘의흥향교’는 임진왜란(1592년)때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다. 당시 향교 직임職任인 돈암遯巖 손기남孫起南(1529-1606)이 위패를 받들고 선암산船巖山으로 옮겨 재앙災殃을 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의흥향교만 오직 임란전에 모시던 위패가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대성전은 도·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4) 전국에서 가장큰 법주사 왕맷돌

소보면 청화산 기슭에 자리한 법주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초창 당시에는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나 소실되었고, 현재 사찰은 소규모로 세운 사찰이다.

이절에 남아 있는 왕맷돌은 위·아랫돌 모두 지름 115cm, 두께 15.5cm의 크기로 국내에서 가장큰 맷돌로 알려져 있다.

맷돌은 2개의 돌을 아래, 위로 포개어 놓고, 위의 돌을 회전 시킴으로써 곡물을 갈게되는 것으로 윗돌에는 곡물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랫돌에도 잘 갈리게 하기 위한 홈이나 구멍을 두는데 이 왕맷돌은 모두 4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하게 생긴 맷돌이 카즈흐공화국 알마아타박물관과, 우즈베크공화국 브라하박물관 등에 전시되고 있어 고대부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상북도 민속물 제112호로 지정 되어있다.

5)도내 최초의 김유신사金庾信祠

김유신(596-673)의 장군신은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시되는 것으로, 김유신 사후에 신격화된 것으로 받들어진다.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군위현에 김유신사가 있는데 거의 어머니 만명萬明을 모시고 있으며, 무녀들이 만명을 섬기는데 신당神堂에는 반드시 명도明圖라는 구리거울을 걸어놓았다.”라고 하였다. 무당이 죽은 영혼이라 받드는 ‘말미할머니’는 다름아닌 ‘만명’인 것이다.

『동국세시기』 <단오>조에는 “군위군 효령 서악西岳에 김유신 사당이 있는데 속칭 ‘삼장군당’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매년 단오날에 그 고을 수석아전이 고을 사람들을 데리고 역마로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신神을 맞이해 마을로 내려와 제사하는 풍속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효령현에 서악이 있는데 ‘삼장군당’이라 속칭된다.

매년 단오에 현의 수석아전이 고을 사람을 거너리고 역기驛騎에 기旗, 북鼓을 달고 신을 맞이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고 적고 있다.지금도 정초 상원上元(음력정월15일)과 5월 단오에 관민이 합심하여 제례를 올리게 되었다.

6) 전국 유일의 한밤마을 이끼긴 돌담길

부계 한밤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눈에 뛰는것이 돌담이다. 이 마을에 돌담이 많은 이유는 마을에 원래 돌이 많기 때문이다. 돌이많아 마을사람들은 “돌도 치우고, 담도 쌓아야지”라고 하며 돌담과 돌마당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

특히 이마을은 경오년(1930년) 가장 큰 홍수로 마을주변 농경지가 수해로 인해 많은 돌들이 마을로 떠내려와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전체 돌담길이 4-5km나 된다 전국에서 이끼낀 돌담길로써 최고라 하겠다. 차제에 돌담길 복원사업과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정확한 통계로 돌담마을 관광자원화 하여야 하겠다.

7) 한국최초의 추기경樞機卿 김수환金壽煥 고향마을

군위읍 용대리서 성장하여, 한국최초 추기경이 된, 김수환(1922-2000) 신부가 임면된 것은 1969년 3월 28일 오늘의 한국역사상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됐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김수환 서울 대교구장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이마을에서 성장한 김추기경의 저서로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정밀조사를 하면 군민출신으로 도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이색적인 기록을 가진분들을 발굴하면 많을 것이다. 차제에 군, 자채에서 <최고·최초 기록물 찾기>를 실시하여 군위군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자랑거리로 스토리텔링화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고, 책자를 제작 홍보하여, 계속발굴 되도록 관계공무원들의 노력과 군민의 협조가 선행되도록 이사업을 적극 전개 하기를 기대해 본다.<前, 성주부군수>

홍영선(洪永善)
[경북대퇴계연구소,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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