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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초가을

admin 기자 입력 2020.10.19 22:52 수정 2020.10.19 10:52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하얀 입김이 피었다 사라졌다 한다. 코끝이 시리고 새벽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온몸이 움츠러들고 두꺼운 옷 생각이 난다.

가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가을이 왔나 보다 하고 창밖을 내다본다. 산과 들녘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면서 가을의 색을 띠기 시작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보리를 베어내고 모내기하기 전 논에 물을 넣는다. 소의 목에 멍에를 걸치고 짚으로 엮은 굵은 새끼줄을 쟁기에 연결하여 땅을 간다. 써레로 논을 평평하게 고른다.

외국어를 한 글자도 모르면서 ‘오라이’는 할 줄 안다. 여러 사람이 한 줄로 서서 모를 심으면서 먼저 심은 사람이 ‘오라이’ 하며 줄을 넘긴다.

장난기 많은 사람이 줄을 튕겨 버린다. 흙물이 온 얼굴에 튀어 꼴이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는다고 웃어댄다. 재밌고 고된 줄 모르고 모를 심는다. 김매고 병충해 방제를 하면서 풍년을 기원한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대추 감 등 과일도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땅 위에 허리를 반쯤 드러낸 무, 펑퍼짐하게 자란 배추도 긴 장마를 이겨내고 싱싱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누렇게 익은 벼를 베려고 논 둘레에 삽으로 도구를 친다. 가을은 바쁘고 분주하다.

하지만 “여름에 하는 일은 하면 할수록 늘어난다지만, 가을에 하는 일은 할수록 하나씩 줄어든다.”라는 말이 있다.

일거리가 하나씩 둘씩 줄어들면 곳간에는 곡식이 차곡차곡 쌓인다.
피곤하지만 이것을 보면 일하는 재미도 솔솔하다. 가을은 풍요롭고 넉넉한 계절이라고 하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간다. 치악산에서 새빨갛게 물든 단풍이 사진기에 잡힌다.
들녘에 추수를 기다리는 누른 벼들이 가을을 재촉한다. 논 갓(변두리)을 삽으로 도구를 치며 가두었던 물을 빼낸다. 분주히 일을 마쳤다.

이때 농촌에서는 찬 이슬이 맺힌다는 한로(寒露)까지는 약간 조용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맘때가 되면 모임, 계 등으로 내륙지방에서는 광어 우럭 돔 도미 같은 회를 먹을 수 없어 남해 동해 서해로 찾아가서 마음껏 먹고 오가며 하루를 즐긴다. 경자년 올해는 코로나 19 발생으로 갈 수 없었다.

자전거 타고 구불구불한 논길 따라 산책한다. 벼의 색이 어제오늘 다르게 변한다. 논에서 삽으로 도구를 치는 모습을 본다.

옛날 같았으면 으레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은 농사용 기계로 농사지으므로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밀기울 떡, 개떡 등이 군것질거리가 전부였다. 도구를 치면서 벤 벼로 찐쌀을 만든다. 찐쌀을 호주머니에 불룩 넣어 입에 조금씩 넣고 우물거리며 다녔던 시절이 아련하다.

물렁물렁한 찐쌀은 너무 맛있었다. 학교 갈 적에도 수업하면서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한 번은 수업 도중 선생님에게 들켰다.

앞에 불려 나가 호주머니에 있는 찐쌀을 모두 빼앗겼다. 아까워서 아끼며 조금씩 먹었는데 빼앗기고 나니 아깝고 선생님보고 욕도 많이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벼가 누렇게 익으면 찐쌀 생각이 난다. 들판을 지날 때면 찐쌀 찌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가던 걸음 멈추고 마음껏 들어 마신다. 그 순간만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너무나 행복했다.

해가 짧아지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다. 들녘은 백로가 날아 앉은 듯 벼를 베는 사람들로 하얗다. 나는 낫으로 벼를 두 줄씩 베고 아버지는 네 줄씩 베어나간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땀만 뻘뻘 흘렸지 아버지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아버지는 뒤를 한 번씩 돌아보시며 “뭐 하노, 빨리 따라오지 않고” 하시며 재촉하신다. 피곤함과 일에 찌들어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점심 먹을 때라야 쉴 수 있는데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어디서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목을 길게 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본다. 누나가 한 손에 주전자 들고 대소쿠리에 점심을 담아서 이고 온다.

일하기 싫던 차 낫을 내던지고 누나한테 달려간다. 지게로 저도 무거운 점심을 머리에 이고 오느라 누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무거운 대소쿠리를 받아 내렸다. 갈치에 무 넣고 부글부글 끓여온 냄새가 허기진 배를 더 고프게 한다. 나란히 깔아 놓은 벼 위에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는 이웃집 사람에게 점심 같이 먹자고 소리친다. 어머니는 밥 한 숟갈 떠서 ‘고시네’ 하며 던진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들에서 먹는 밥맛은 꿀맛 같았다. 배불리 먹고 나니 절로 하품이 나고 잠이 쏟아졌다. 따가운 햇볕이라도 잠은 이길 수 없었다. 깔아 놓은 벼 위에 벌렁 누워 세상모르게 잠에 곯아떨어졌다.

벼를 며칠간 베었다. 몸이 녹초 되고 꼼짝도 하기 싫어졌다. 죽을힘 다해 벼를 다 베고 뒤를 돌아보았다. 논바닥이 운동장같이 훤했다. 언제 다 할까 답답했던 마음이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가을은 좋은 것만 아니다. 때론 이별의 아픔을 주기도 한다. 새파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목말라 잎이 누렇게 변하면서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우글거리던 새들도 어디로 날아갔던지 보이지 않는다.
아침저녁 쌀쌀한 찬바람이 사람들의 옷깃을 파고든다. 옷이 점점 두꺼워지고 거리가 어둡고 한결 무거워진다.

황금 들녘도 차가운 가을바람에 견디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간다. 가을, 서글프고 허전한 마음마저 든다. 가을은 숱한 사연을 남긴 채 휘황찬란했던 1장 3막을 내린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을은 손사래 치며 내 곁을 휭 떠나버린다. 올해 못다 한 일들 내년에는 꼭 이루어보려고, 깊어가는 가을밤에 새 희망을 꿈꾸며 포근한 잠을 청한다. 꿈속일망정 그대로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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