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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admin 기자 입력 2021.01.04 10:16 수정 2021.01.04 10:16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시커먼 구름 떼가 서서히 모여든다. 어두컴컴해지면서 금방이라도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다.

겨울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워 비나 눈이 올지도 모른다. 겨우내 땔감을 부엌과 헛간에 켜켜이 쌓아 겨울 준비를 단단히 한다.

옛날 어른들이 눈 오는 날이면 다리 밑 거지들이 빨래하는 날이다.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내왔다. 나중에 알았던 일이지만 눈 오는 날은 공기 중에 수분이 응고되면서 발생하는 열기로 포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첫눈 내릴 때는 마냥 즐겁고 기쁘다. 잿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 따라가며 받아먹느라 정신없다. 동네 또래들과 눈사람 만들며 눈싸움도 하고 썰매 타며 신나게 노느라 배고픈 줄 모른다.

아버지는 첫눈 내리는 것을 보고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겠다, 흉년이 들겠다고 하신다. 눈(雪)을 눈으로 보지 않고 따뜻한 이불로 생각하신다. 눈이 많은 해는 보리가 눈 속에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며 무럭무럭 자란다.

눈이 없는 해는 땅이 메말라 보리가 수분 부족으로 싹을 틔우지 못한다. 뿌리를 내렸다 하더라도 날씨가 건조하여 거의 말라 죽게 된다. 초등학교 다닐 때이다. 보리가 웃자라 말라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교생이 보리밟기 하기 위해 들녘으로 나갔던 일도 있었다. 당시에는 식량부족으로 보리 한 톨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느 해.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렸다. 자로 재어보았다. 20cm 자가 눈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눈가래(넉가래)로 뜨락에서 사립문까지 눈을 치웠다. 눈가래는 지나간 흔적을 남기며 뒤 마무리를 말끔히 해주었다.

얼굴은 빨갛고 등에서 김이 무럭무럭 난다.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해지고 힘이 빠진다. 눈가래를 내던지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눈을 다 치우고 나면 마음이 흐뭇했다.

성격은 생후 18개월부터 형성된다는데 커가면서도 형성되는가 보다. 생각건대, 성격도 남달리 별났다. 눈을 칠 때면 여기저기 쉬운 대로 치면 될 터인데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쳤다. 좋은 습관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었다.

군 생활을 강원도 인재에서 했다. 첫눈이 내리면 겁부터 났다. 강원도에는 눈이 오면 우리 키만큼 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눈 오는 날은 그랬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잔뜩 찌푸려 있다.

눈송이 하나가 바람에 실려 사뿐사뿐 내린다. 어디로 갔던지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가 내린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녹아버렸다. 그러다가 찌푸린 하늘이 파란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이곳 강원도에는 첫눈이 함박눈으로 펑펑 쏟아지면서 금방 무릎까지 차올랐다.

어릴 때 눈 오기만 기다렸던 생각이 꿈만 같았다. 언제 저 많은 눈을 다 치울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눈 치우는 장비라고는 고작 싸리나무 빗자루가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잎줄기 하나 붙어있지 않은 나무막대기를 새끼로 둘둘 말아 놓은 것이었다.

이곳 날씨도 눈이 오는 날은 역시 포근하다. 물 먹은 눈이 쌓이면서 찰떡같이 달라붙어 싸리나무 빗자루로는 어림도 없었다. 종일 눈을 치고 나면 피곤기가 잠을 달랜다. 밤사이 눈이 또 가득 쌓여 있다. 하는 수 없었다. 막사와 막사에 긴 밧줄을 연결해서 시간마다 돌리고 했다. 다행히 밧줄이 닿는 땅에는 눈이 적게 쌓여 쉽게 다닐 수 있었다.

세상 이치를 남보다 늦게 깨달은 탓일까? 늦깎이 석사과정을 밟을 때였다. 졸업 시험 날이다.
첫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조심스레 천천히 달렸다. 언덕 고개를 숨죽여 가며 겨우 올랐다. 50m 넘는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브레이크를 밟으며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에 브레이크에 발을 얻는다. 순간 차는 그 자리에서 서너 바퀴 돌고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았다. 차가 몇 바퀴 더 돌았는지 모른다. 기아를 1단계로 하고 사이드 브레이크 잡아당겨도 되지 않는다.

차는 가속도가 붙어 더 빨리 미끄러져 내려간다. 가슴이 벌떡이며 어찌할 줄 몰랐다. 얼마나 내려갔던지 저절로 멈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후부터 눈 오는 날이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몇 해를 잘 넘겼다. 어느 해 아침부터 내리던 첫눈이 길바닥에 쌓일 듯 말 듯 내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마음 놓고 운전했다. 몇 미터 앞에 커브 길이 있다는 교통 표지판이 나왔다.

눈을 고정하고 조심스레 운전하는데 앞바퀴가 1cm 정도 안 되는 높이에 미끄러져 차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두 바퀴 돌았다. 몇 년 전에도 이런 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뒤에 차들이 따라오지 않았기에 다행이었다.

이제는 몇 년 전과 달라 내가 아무리 잘했어도 나이를 들먹이며 모든 것을 나이 탓으로 돌린다. 오기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여상스럽게 타고 다닌다.

첫눈 내릴 때 설레었던 마음이 이 나이 될 때까지 아직도 가슴속에서 흐르고 있다. 어릴 적 기억이 어른이 되어도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좋았던 기뻤던 놀랐던 일들이 머릿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입 벌려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 따라가면서 먹기도 했던 그 시절 다시 돌아올까, 첫눈은 말없이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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