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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국화빵

admin 기자 입력 2021.01.18 10:44 수정 2021.01.18 10:4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겨울밤은 유난히도 춥고 길다. 잠이 오지 않아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한다. 저녁 먹은 배가 언제 먹었느냐며 꼬르륵 소리가 난다.

한밤 중에 성그런 꽁두 보리밥에 얼어붙은 김치를 맛있게 먹는다. 입안이 얼얼하고 등허리에서 찬바람이 나온다. 오들오들 떨면서 아랫목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한국전쟁 후 경제가 어려울 때였다. 군것질하고 싶었지만, 요즘처럼 먹거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겨울철 먹거리는 기껏 묵 두부 엿 등이 전부였다.

배추 뿌리 감자, 고구마, 등도 있었지만, 일상에서 쉽게 먹을 수 있었다. 내기하기가 한창 유행했다. 내기해서 엿 등 여러 가지 먹거리를 먹고 했다.

학창 시절 추억거리는 잊을 수 없다. 겨울이면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것이 있다. 바로 빵틀에서 금방 구워 나온 노릇노릇한 냄새가 나는 국화빵이다.

군 소재지에 중·고등학교가 하나뿐이다. 삼사 십 리 밖에 떨어져 있는 학생들은 학교 주변에 방을 얻어 자취한다. 소재지에 거주하고 있는 나는 방을 얻고 하는 어려움을 모르고 지낸다. 추운 겨울밤 자취하는 친구 집에 대여섯 명이 모여 재미있는 이야기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한 친구가 “야! 우리 이렇게 심심하게 놀 것이 아니라 빵 내기하며 놀자”라고 말을 꺼낸다.

“심심하던 참에 잘됐다” 하며 우리는 모두 두꺼운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가게로 갔다. 초저녁이 지나 밤이 약간 이슥했다. 가게가 썰렁하고 희미한 전깃불 밑에 가게 주인이 우두커니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장승만 한 키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 대여섯 명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게 주인은 깜짝 놀라 겁에 질린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청년들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로 가에 빙 둘러앉아 내기하는 방식을 두고 이야기하느라 시끌시끌했다.

세 사람씩 편을 갈라 가위바위보로 이긴 편은 공짜로 먹고 진 편은 빵값을 몽땅 내기로 했다. 경기는 1:1, 2:2로 박빙이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마지막으로 내가 할 차례가 되었다.

우리 편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하면 빵값은 우리 편이 걸머져야 했다.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무섭고 떨렸다.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쑥 내밀었다. 그 순간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편이 외치는 소리 같았다. 긴가민가하며 눈을 살며시 떠보았다. 분명 우리 편이 외치는 소리였다.

상대편은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처음에는 우리 편도 나를 못 마땅히 여겼다. 내기할 때마다 내가 들어간 편은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상황이 달라졌다. 야! 인마야, 우리 편에 네가 있어, 질 줄 알았는데 네가 이겼다니 꿈만 같다. 네가 생에 처음으로 이긴 날짜 아닌가. 메모해 두었다가 길이 보존하라 하며 부산을 떨었다.

공짜로 얻어먹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빵을 입에 한 입 불룩 넣고 씹는 재미도 솔솔 했다. 세상에 빵 맛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며 애를 달구었다. 진 편은 빵틀에서 갓 구워 나온 빵 냄새만 맡고 있었다.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먹지 못한 참담한 심정 누가 알겠느냐만 딱한 노릇이었다. 어떻게 참았든지 믿기지 않았다. 우리가 젓가락으로 빵을 집어 올릴 때마다 상대편의 눈동자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침을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내기라 하지만, 얻어먹는 사람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내는 사람보다 눈치가 더 보였다. 무턱대고 많이 먹을 수 없었다. 상대편 주머니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빵값을 같이 내고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국화빵은 언제나 인기가 대단했다. 길거리 여기저기서 빵을 구워 파는 포장마차가 많이 생겼다. 빵에 무엇을 넣었기에 그렇게 맛있든지 궁금했다. 어느 때보다 날씨가 쌀쌀했다. 산뜻하게 꾸민 포장마차 한 대가 길모퉁이에 있었다. 거기에서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빵을 부지런히 굽고 있었다.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구경하고 싶었다.

밀가루에 물을 적당히 붓고 설탕을 조금 넣어 골고루 섞는다. 물렁물렁한 반죽이 되었다. 이것을 주전자에 넣는다. 주전자로 빨간 숯불 위에 있는 국화빵 틀 하나하나에 붓는다. 하얀 반죽이 빵틀을 가득 채운다. 그러고 나서 삶아 놓은 붉은 팥 한 숟갈을 넣는다. 주인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철사로 만든 갈고리로 빵틀을 돌린 다음 빵틀 뚜껑을 연다.

노릇노릇하게 굽힌 국화빵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소쿠리에 옹기종기 모여 데리고 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철 국화빵은 우리에게 더없이 친숙했다. 그렇다고 어려운 살림에 먹고 싶다고 마음 놓고 사 먹을 수 없었다. 내기하면서 빵이랑 먹고 싶은 것 먹으면서 웃고 즐기기도 했다.

내기하기가 재미있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어렵던 한 시대를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옛날 먹거리가 현대 먹거리에 밀려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나마 길거리에서 풀빵이라며 붕어빵, 잉어빵, 국화빵을 굽는 것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겨울이면 국화빵 생각이 난다. 길거리에서 굽는 국화빵 냄새가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시대는 바뀌어도 맛과 향기는 그대로이다. 긴 밤을 보내면서 먹을거리 찾으려 다녔을 때가 엊그제 같다. 국화빵 내기하며 밤새는 줄 모르고 놀았던 추억들이 아련하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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