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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admin 기자 입력 2021.02.02 22:31 수정 2021.02.02 10:31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악몽 같은 순간이다.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갈 길 잃어 헤맨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정신이 흐릿해진다.

숨이 차오르고 입이 바싹 마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리가 풀리고 힘없이 쓰러질 것 같다.

어둠은 막연히 불안하고 두렵다. 내 삶의 전부를 다해도 빠져나오기는 너무나 벅차고 힘이 든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스스로 무너진다.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하나뿐인 생명을 가진 사람이기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생사 갈림길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자연스레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욕심이 지나치면 과욕을 불러일으킨다. 과욕이 지나치면 화를 면치 못한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쓸데없는 욕심으로 화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초등학교 나오면 서로의 갈 길을 택하여 열심히 살아간다. 친구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뜻있는 몇몇 친구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자 하며 초등 동기회를 만든다.

40여 명이 모여 옛 추억을 더듬는다. 창립 반세기를 훌쩍 지난 지금 반 이상이 줄었다. 죽음을 앞둔 우리는 아직도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초등 동기인 한 친구가 있다. 이는 벼농사를 지으며 과수 농사와 약초 재배하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친구다. 5일 장에 볼일이 있으면 한 번씩 들려주고 한다. 성격은 무뚝뚝하지만 이야기할 때는 친밀감도 남다르다.

농사지으며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밌게 한다. 벼 매상하던 날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이야기며 약초를 팔고 수지맞았던 이야기, 자두를 팔아 짭짤한 재미를 봤다는 이야기 등을 하며 입이 마른다. “어떤 약초를 재배해 봤나?” 하니 “황기, 시호, 지황 등 여러 가지 약초를 재배했다”라고 한다. 호기심에 “일천여 평 넘는 밭이 있는데 약초를 재배하면 되겠냐”라고 물어본다. 그 정도면 병원 수입보다 훨씬 더 좋을 걸 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선배 공수의 한 분이 면 소재지에서 개원한 지가 수년 넘는다.
그 면에는 지황 황기 등 여러 가지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선배는 가축 진료하면서 틈틈이 시간 날 적마다 약초도 취급한다. 약장사라는 별명까지 받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하다. 선배 따라 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다. 그러던 참에 친구 이야기를 듣고 지난날 꿈꾸었던 미련이 되살아난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니 겁이 난다. 농사일은 어릴 때 아버지 따라 해 봤던 것뿐이다. 자본도 시간도 넉넉하지 못해 몸이 움츠러들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생각을 주저할 수 없다. 마음을 단단히 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변하여가며 살아가고 있다. 파종한 약초가 뿌리를 내리고 제 모습을 서서히 갖추기 시작한다. 하얗던 밭이 푸르게 변하며 몰라보게 달라져 간다. 마음이 흐뭇하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잡초가 약초를 뒤덮는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에게 밭을 매달라고 부탁한다. 때가 되어 새참을 가지고 밭으로 가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밭을 다 매고 내려갔는가 생각한다. 며칠 지난 뒤 밭에 나가보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약초는 온데간데없고 잡초만 무성하다.

꿈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믿기지 않은 상황을 보면서 황당하고 당혹감에 어찌할 줄 모른다.

사람이 변한다고 해도 이렇게 변할 줄이야. 유심히 살펴본다. 호미가 지나간 자국이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밭을 매지 않고 시늉만 했을까 허탈한 생각이 든다. 살아가기 무서운 세상, 내 것처럼 해 주는 사람 찾아볼 수 없다.

있는 것 없는 것 끌어모아 정성을 다한 것이 고작 이거였던가? 마음 한구석에 씁쓸하고 허전한 마음 가득 자리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금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하며 매달렸던 나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참말인가 싶다. 사람만 변하는 것뿐이지 세상은 그대로다. 희망의 불씨는 결코 세상의 연을 끊지 않는다. 우거진 잡초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약초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다. 바싹 마른 잎들이 바람결에 힘없이 흔들린다. 볼수록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

가을이면 수확한다. 노력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세상은 차갑고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어두운 세상의 참모습일까, 하늘 같이 믿었던 그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슬프게 하며 애를 태우게 한다.

그것도 모자라 늦가을 비를 여름 소낙비 같이 쏟아지게 한다.
시뻘건 흙탕물이 오다가다 외롭게 서 있는 약초를 사정없이 뿌리째 쓸어버린다. 밭 언저리에 산더미 같이 수북하게 쌓이게 한다. 하나도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앞이 캄캄하고 참담한 심정 하소연할 때 없다. 허탈과 좌절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흙에 뒤범벅된 약초를 흙더미에서 끄집어내면서 변해가는 세상의 마음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과욕이 지나치면 화를 면치 못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욕심을 부릴 것도 아니다. 어둠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으려 몸부림친 것뿐이다.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라도, 코로나 19로 고통받고 있는 온 세상이 하루빨리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찬란한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신축년이 되기를 바란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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