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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信濟)

admin 기자 입력 2021.02.18 23:06 수정 2021.02.18 11:06

↑↑ 박두익 대표
ⓒ N군위신문
경북 군위군 신제네 집은 원래 가난했던 것이 아니고 그의 증조부모 시절에는 부농이었다. 그런데 증조부는 연세가 들어 돌아가시고, 1남2녀 중 큰 사위가 신제 증조모를 꾀어 이웃한 의성 속칭 새못안 광산에 투자했다가 실패하여 파탄이 났다.

집안은 갑자기 풍지박살이 나고 신제 조부님은 원래 부잣집의 자손이라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고 결국 가정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신제의 아버지가 결혼을 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신제의 어머니는 가정의 중심축 역할을 할 만큼 총명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국문소설을 수십권을 읽으셨고, 인근 주민들의 자녀결혼 때는 사돈지를 써 달라는 주문이 쇄도할 정도였다.

신제의 부모님은 결혼 초 가난의 타개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목욕탕에 물을 데우는 등 허드렛일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벌이가 생겨 고향 경북 군위군으로 신제의 조부모님께 생활비를 부치는 등 생활체계를 구축하였지만 2차대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생활터전을 잃어 버렸다.

빈손으로 귀국한 아버지는 대구라는 도시로 가서 구멍가게를 하던 해서 절대적 빈곤을 답습하지 말자는 어머니의 의사를 물리치고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라는 가업을 이어받고 말아 그만 지게 목발 밑에 놓이게 되었다.

다른 집의 머슴으로 지내는 등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던 가운데 신제보다 7살 연상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귀국한 형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러나 부모님은 끊임없이 피와 땀과 눈물로 노력하여 지금의 사실련 연수원 신제당(信濟堂) 자리에 가옥을 건축하고, 논밭 10여마지기를 구입하여 생활 체계를 구축하였다.

신제가 소년시절에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고향 군위군 우보면에는 지금은 전국 낚시인들이 찾는 ‘풍곡지(風谷池)’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 제방을 쌓을 때나 마을의 큰 공사를 할 때 일반 동네 주민과 신제 아버지와는 품성이나 처신면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즉 머릿속에 먹물을 몇 줄 튀긴 어른들은 댓돌에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서 입으로 마을 분위기를 주무를 뿐이고, 지렛대 같은 중장비로 엎드려 궂은일을 하는 것은 항상 신제 아버지였다.

신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하루는 허실근(許實根) 교장 선생님이 신제네 집을 방문하였다. “신제 학생의 집이 대단히 가난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 봉산 초등학교 전교 1등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라 학교 차원에서 중학교 진학이 필수적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경북 중학교는 경북도내 최 일류이나 입학금이나 공납금이 드니 그에 앞서 이런 돈이 안 드는 대구 능인(能仁) 중 특대생 입시 원서를 대구에 가서 가져 왔으니 꼭 입학 시험장에 보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그렇지만 돈이 전혀 안 들겠어요? 우리 아이는 중학 진학을 못합니다.” 라고 답하셨고, 이에 아래 윗집 동민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 선생님이 자기 비용을 들여 대구에 가서 원서까지 갖고 오셨는데 거절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결국은 아버지는 여론에 굴복하여 신제를 데리고 능인 중학교 시험장에 갔다. 학교 입구에 난생 처음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시험을 한 시간 치고 나온 신제는 합격할 예감이 들어 깡충거리고 있는데 아버지는 먼 산을 보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둘째 시간 치고 나왔는데 이번에는 다른 산 쪽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셨다.
먼 훗날 알고 보니 아버지는 신제가 시험에 불합격하기를 내심 빈 것이었다.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신제는 그 후 중학교 3년간 장학혜택과 과외 개인지도로 학업을 마치게 된다.
신제는 능인 중학교라도 전교 1등이면 공립인 경북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교 명예를 올려야지 왜 사립인 계성(啓聖) 고등을 갔느냐고 주변 교사들의 지탄을 받았다.

경북 고등에 가면 등록금을 내야 되므로 진학을 못하고 계성 고등에 가면 장학생이 될 확률이 커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속사정도 모르고.

하여튼 계성 고등에 진학하여 예영수 선생님(훗날 서울 외국어 대학교 사대학장 역임) 반에서 1등을 하고 모의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는 등 제법 엘리트 코스를 달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 가정교사, 장학생 유지에 대한 스트레스, 자취생활, 문학에의 심취, 문학병으로 신경쇠약 증세, 전 주경 홍익대 미대 학장님으로부터 석고 데생 배우기,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던 자유 민주주의와 시골에 밀조주 단속반, 산림 감시반 등 당시 자유당 관존민비 의식의 횡포로 인한 예민한 감수성이 곤두박질쳐 1965년 6·3 대구 계성 고등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이 사건으로 훗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재학 중 제27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였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임용되지 못할 줄이야) 이후 그 후유증으로 휴학하고 고향에 오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신제는 약을 사려고 우보면 소재지에 나갔다가 초등학교 동기를 만나 신세타령을 하며 술을 퍼마시게 되었다. 그런데 외출한 아들이 귀가하지 않아 걱정이 되어 야밤중에 10리나 떨어진 식당으로 신제의 아버지가 들이닥친 것이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아버지의 급습이라니, 신제는 얼마나 놀랐는지!

술값으로 후배의 자전거를 잡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앞에 가시고 신제와 동기는 뒤를 따랐다. 서로 간에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순간 얼마나 신제의 심사가 심란했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몽둥이를 가져와서 자기를 내리쳐 달라고 그렇게 울먹여도 신제 아버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전혀 손찌검이 없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순백한 분이 계셨다니.

박두익 작가(사실련 대표)
(사회정의실현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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