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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생명의 철학이다

admin 기자 입력 2021.04.18 23:15 수정 2021.04.18 11:15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우리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쓴 인생의 각본에 주연으로 내 인생을 연출한다는 게 연극 같고 드라마 같기도 하다.

인생을 이상향만 꿈꾸며 돈키호테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다간 쪽박 신세가 될 수도 있고, 돌다리도 두들겨 망설이고 주춤거리다 별을 잡는 순간을 놓쳐버리고 수수하게 햄릿처럼 살 수도 있다.

연습이 불가능한 인생의 일생을 연출한다는게 참으로 어렵다. 작년부터 오디션을 통해 스타덤에 오르는 트롯가수들을 볼 때 참 부럽기도 했다.

인생을 흔히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항해하고 있을까. 제대로 항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침판도 없이 거센 풍랑에 방향을 잃고 바다에서 코르크 병마개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은 아닌지.

항로를 가늠할 수 없다면, 구조를 기다리는 조난선처럼 속수무책으로 항구에 SOS 신호를 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우리네 인생도 잘 풀리지 않을 땐 경륜 많은 사람에게 자문을 받으면 좋으련만 서푼 어치 자존심 세우다 붙박이처럼 죽친 인생 얼마나 많든가.

인생은 연습 삼아 한 번 살아 보고 난 후, 다시 태어나 새롭게 멋진 항해를 해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여자도 남자도 오로지 찰나 같은 인생 열차에 승차할 한 장의 티켓은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순간에 주어진 운명의 시간들을 멋지고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생을 두고 성공적이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열정의 관건은 쉼없는 꾸준함인데 지나고 보니 그러질 못한 후회에 먹먹한 가슴만 두드린다. 나도 어쩌지 못하고 그 속에 덩그러니 앉아 뒤늦게 한탄한들 잃어버린 세월 돌아오겠나. 여한(餘恨)이 있다면, 인생 겉가지라도 간추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 뿐인 삶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 소박한 예의가 아니겠나.

영국의 시인 월리엄 어니스트 헨리가 쓴 삶을 대변하는 예언적 시구를 읊어보자.

“지옥같이 캄캄한 온 세상 어둠이 / 나를 뒤덮는 이 밤
나는 어떤 신에게든 감사하노라 / 내게 굴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음을,
--2연 중략-
천국 문이 아무리 좁아도 / 저승명부가 형벌로 가득차 있다 해도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굴하지 않는다> 중 일부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이런 확신이라면 무얼 못 하겠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좌절하지 않으면 반드시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희망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을 믿고 조금 더 힘을 냈드라면, 오늘 보담 사람답게 대접받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와 결심을 굳히도록 질책을 해야 마땅한데 극기(克己)의 한계선을 넘기지 못한 연출자의 무능으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인생 최고로 난이도가 높은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멋진 작품으로 완성할 수도 있고, 실패작으로 끝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기울어진 인생의 후반전에서도 결승골도 나오고, 야구경기처럼 9회말 투아웃이란 절박한 찬스에서도 짜릿한 역전승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도 스릴 넘치는 스포츠와 다름 없다. 죽을 것 같아도 사람 목숨 쉬이 죽지 않는 법이다. 삶이 우리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도 “진실한 삶이란 생사를 건 싸움 끝에 가능하다”고 했다.

소설가 헤밍웨이가 쓴 소설 ‘노인과 바다’는 200 번 넘는 퇴고(推敲)에 퇴고를 거듭하는 천신만고 끝에 불후(不朽)의 명작을 발표해 플리쳐상을 받았고, 이듬해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도 받았다.

우리도 마지막 끝날 때까지 삶이라는 일생 최고의 예술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 기울린 만큼 사람마다 성취하는 질은 다르겠지만 정도의 목적은 이루리라 생각한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 꽃이 피면 지게 마련이다. 꽃의 일생을 보면 아름답기만 한가.
그것은 유의미하고 유정한 일이기도 하다. 꽃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일생을 돌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누구나 지나간 삶을 돌이킬 때면 ‘아, 벌써!’하는 감상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아마도 무정하게 흘러가버린 세월과 뜻한 대로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리라.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가는 길도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세월이 참 무심하고 덧없이 지나간다고, 남의 삶을 곧장 구경해도 제 인생은 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맺힘의 소중함이, 피어남의 찬란함이, 사라지는 노을 같은 눈부심이 있을텐데 우리는 잊고 산다.

그러니 봄꽃이 피었다 지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꽃과 다르지 않음을 일러 주려는 자연의 깊은 뜻인지도 모르겠다.

4월의 서정은 오라고 손짓 하지 않았는데 와서,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서서히 가려 하고 있다. 꽃도, 봄도, 인생도 홀씨처럼 날아가려 하니 이 안타까움 누구에게 말하랴.

황성창 시인
수필가. 재부의흥향우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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