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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첫 경험

admin 기자 입력 2021.05.02 22:36 수정 2021.05.02 10:36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60년대 모든 것이 부족했다. 가진 것이라곤 수의사 면허증 한 장과 젊은 열정과 패기 그리고 자전거 한 대가 전부이다. 남부럽지 않은 재산이라 여기며 이를 가지고 살아보겠다고 전셋집에 세 들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도로 양편에는 포플러가 간격에 맞춰 줄 서 있다.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도로에는 자갈뿐이다. 자전거 타고 갓길 다니느라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뿌연 먼지를 덮어쓰고 눈만 빠끔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언덕 아래로 떨어졌던 일도 다반사다.

혼자 속앓이하며 불평 없이 지낸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십여 리 떨어진 마을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으려 하는데 낳지 못하고 있다며 걸려온 전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난산이다.
새끼를 무사히 받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초조하고 신경이 곤두선다. 어려운 난산이면, 숨이 막힐 듯 조여든다.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양손을 불끈 쥔다. 잘난 척해도 남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오늘은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시험 치는 것같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그 집 앞에 도착한다. 하얀 먼지 덮어쓴 나를 마중하며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든다. 눈인사하고 바쁘게 마구간으로 들어간다. 주인에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과정을 소상히 물어본다.
소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네다리를 쭉 뻗고 누워있다. 체온을 잰다. 맥박 등 모두 정상이다.

지금은 팔 길이만큼 긴 비닐장갑이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손톱을 깎고 비누로 손과 팔을 깨끗이 씻는다. 조심스레 자궁 속으로 손을 넣어본다.

새끼의 태위가 정상 아니고 반듯하게 누워있다. 소 스스로 새끼를 낳을 수 없다고 주인에게 설명한다. 주인은 어떻게 하든 빨리 빼내 달라고 한다.

새끼가 살아 있는지 손가락으로 살며시 눌러본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처치할 준비를 서두른다.

양수가 터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양수 막을 손가락 길이로 짧게 찢는다.
양수가 한 양동이만큼 쏟아진다. 새끼를 정상 위치로 돌리고 양쪽 앞발을 서서히 잡아당긴다. 새끼는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죽을 힘을 다해 양쪽 발목을 잡고 체인을 걸려고 하는데 미끄러워 그만 놓쳐 버렸다. 이러하기를 여러 번 했다. 곧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된다.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진다. 팔뚝은 개구리 잡아먹은 뱀처럼 울퉁불퉁하다. 힘이 빠지고 긴장과 피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까스로 앞다리 하나를 체인으로 묶는 데 성공했다. 또 한 다리를 묶고 서서히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새끼는 나오지 않으려고 두 발로 뻗대며 사력을 다한다.

한쪽 앞다리를 잡아 밖으로 당겨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한쪽 앞다리도 그렇게 했다. 머리만 나오면 된다는 생각에 긴장된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다. 그럼에도 밀고 당기는 시간이 너무 길어 잘못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시간이 갈수록 주인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한자리에 잠시도 머물러 있지 못한다. 여기저기 다니며 서성거린다.

나마저 불안해 보이면 주인이 더욱 불안해질 것 같아 애써 태연한 척한다. 천신만고 끝에 새끼를 무사히 받아 냈다.

만신창이 된 새끼는 숨만 헐떡인다. 새끼를 거꾸로 매달아 양수를 빼낸다.
코를 쉬쉬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도 모르게 ‘살았다.’며 큰소리를 질렀다. 기쁨 흥분에 어찌할 줄 모른다. 주인은 마른 수건으로 허겁지겁 새끼 코를 닦아준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주인은 새끼를 꼭 껴안고 어쩔 줄 모른다. 양수 냄새가 마구간을 가득 채운다. 불안·초조 긴장했던 순간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마구간은 웃음꽃이 만발하다.

주인은 “야! 이놈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태웠는지 알기나 해? 까딱 잘못 했으면 너는 황천길로 갈 뻔했다.” 하며 새끼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 준다. 생사 갈림길에 서서 헤매었던 그 순간은 너무나도 길고 무서웠다.

동네 사람들도 일어서려고 비틀대는 새끼를 들여다보면서 환호하며 기뻐한다. 사람 생명만 고귀하고 소중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동물의 생명도 귀하고 소중했다. 난산처치를 무사히 마치고 흡족한 마음으로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돌아왔다.

며칠 뒤 송아지 건강 상태를 보러 갔다. 몰라보게 컸다. 송아지는 보란 듯이 꼬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먼지를 일으키며 마구간을 힘차게 달린다. 생명이 꼼지락거리며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생명의 신비로움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두 발을 뻗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쌕쌕거리며 신나게 한 바퀴 돌고서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힐끔 쳐다본다. 어미한테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젖을 물더니 먹다 말다하며 장난친다. 머리로 젖을 쿡쿡 들이박는다. 꼬리를 흔들며 내 곁으로 슬금슬금 걸어온다.
똥 묻은 옷을 핥으며 코로 흠흠 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어미 소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본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난산 처치를 깔끔히 처리했다. 내 손으로 한 생명을 구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사실인지 아닌지 손으로 볼을 꼬집어본다.

첫 경험에 만족함을 느끼며 지금껏 궁금하고 불안했던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리고 희망찬 내일을 꿈꾼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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