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화산(華山)마을 사람들이야기

admin 기자 입력 2021.05.18 17:25 수정 2021.05.26 05:25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초록의 숲길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궤적(軌適)을 그리며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다 보면 이런 험로에 어떻게 마을을 이루었을까 싶을 때 가파른 산에 기댄 듯 집터를 잡은 華山마을이 나온다.

산길은 누군가와 사계(四季)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자국이다. 하지만 아직 華山은 문명의 손길을 타지 않았다. 산과 계곡을 빙 둘러싸며 둥그런 경계를 만들어 깊고 높은 산의 풍경이 온전히 남아있어 화려함 보다는 기품 있는 華山의 풍경이다.

북풍의 겨울 찬바람에 나뭇잎 살갗 부딪치는 소리는 봉우리 마다 신선들이 불어대는 대금합주 와도 같다.

화산의 아름다움은 서애 유성룡 선생의 일화로도 알 수 있는데, 17세기 초 유성룡(1542∼1607) 선생이 華山을 여행 하였을 때 배앓이에 좋다는 옥정의 샘물을 마시며 화산의 아름다운 절경과 옥정영원(玉井靈源)을 七言絶句 詩로 남겼다.

華山의 마스코트 풍차전망대 앞에 보이는 산허리에는 담쟁이 줄기라도 묶은 듯 서로를 의지하며 기대어 있는 곳에 댐 수몰로 평생 살아온 삶의 흔적을 삼켜버려 고향 잃은 사람들의 눈물방울이 모여 군위 댐의 생명수를 담고 있다.

왜 사람들은 화산마을로 모여드는가?
유람(遊覽)온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에 풍경을 담으며 산수를 즐기고 있고, 지팡이를 짚고 마을 산책을 나온 듯 노인과 손자의 모습이 이채롭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벼랑에서 구름이 생겨나듯 너럭바위 같은 구름은 그물에 묶이지 않으려는 듯 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여러 모양의 진기한 사물을 만들어낸다.

이런 화산마을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환경부분 금상을 수상하였고 EBS 한국기행에서는 구름위에 앉아 있는 신선계의 마을 같다고도 하며, 인간극장에도 화산마을편이 나온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이 화산마을을 찾게 되었고 이제는 관광명소가 되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이 문화생활과 직결되어 피폐해진 정신을 치료해 주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서는데 나와 다른 문화를 찾기도 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문화에 공감하여 서로 감동을 받기도 하는 치유제인 곳이 화산마을이다.

여름날의 우주쇼를 벌이는 은하수를 보기위해 사람들은 높은 건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천색정유리(天色淨琉璃) 같은 하늘을 보기위해 높은 고지대 華山을 찾기도 한다. 각 지역에서 화산에 삶의 터전을 가지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6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5.16군사 정부는 1961년 8월부터 식량 증산과 도시 실업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귀농정착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계획된 귀농정착사업에 6천여세대가 신청하였고 1228세대가 선정되어 7.188명이 12개 지역 24개 지구로 떠났다.

현재 화북 4리 화산마을이라 불리는 이 사업장은 1961년 7월부터 시작된 귀농정착사업의 95세대 581명이 이주해 온 지역이다. 고도 600∼800m 지대에서 밭작물을 재배하였고 당시에 190정보를 개간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A∼D지구 까지 4개의 사업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B, C, D 사업장 지역에 1970년대 3사관학교 유격장이 들어서면서 세 개 마을이 영천시 감자골로 옮겨지고 A지구 초기 16가구만 남아 화산마을을 이루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이래로 현재까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들의 생애가 곧 정착사업의 시작과 진행과정, 그 후 지역의 변화까지 전 과정을 담고 있다.

화산마을에서 동쪽으로 더 들어가 보면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 숙종35년(1709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윤숙 장군이 병영을 건설하고자 축조를 시작한 山城이 나온다. 하지만 이 山城은 거듭되는 흉년과 질병이 만연되어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킬 수 없어 완공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미완성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華山山城이다.

한여름 큰비가 오고 난후 2층 水口門은 고래의 암수가 물을 내품듯 솟구치는 물보라는 힘찬 기상을 보여준다. 어느 석공의 작품일까. 견고한 돌들을 가지고 홍예문까지 만들어 조형예술의 극치를 보여준 화산산성이 균형을 잃고 엎드린 체 기울어버린 현재 華山山城의 참상이지만 잡초 속에 힘든 세월을 꿋꿋이 버텨낸 역사적 유적으로 남아있다.

화산마을에 여행 온 사람들은 이야기꾼이 되어 낯선 사람들과도 함께 옛날 생활상을 이야기하며 함께 공유한다. 화산이야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산전투 이야기다.

다부동 전투에 전력을 쏟았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북한군은 남침의 방향을 신녕 지역으로 돌렸다가 격퇴되었다. 신녕 전투는 영천 전투와 같이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구와 부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북한군의 최후의 공세를 대한민국 국군이 사투를 벌여 잘 막아낸 전투였다.
혈암산(穴岩山 559m)에서 신녕역을 폭격했던 북한군을 하루 동안의 전투로 격퇴하고 혈암산을 확보한 6사단 7연대 1대대는 1950년 8월 28일 북쪽으로 1.5km 떨어진 화산828m 연맥을 향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6.25 전쟁사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치열했던 열흘간의 화산 전투는 피아(彼我)의 혼동 속에 승리를 이끌어낸 숭고의 땅이자 호국의 땅이다.

특히 하루종일 굶은 국군들에게 전해 줄 주먹밥은 보급대원들과 대한청년단들이 전해 주었는데 험한 급사면의 산길을 기어 올라오다가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고추장을 바른 주먹밥은 솔잎 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피아(彼我)는 아군에서 적군진지로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식량을 전달하러 갔던 보급대원들이 사살되기도 했다.

귀농정착 1세대의 당시 주민들은 개간을 하면서 유골과 폭탄 파편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 했다고 한다. 화산마을 귀농정착 1세대로써 지금도 화산마을에 살고계시는 서선열 할머니를 통해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화산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1961년 7월 29살 때 시어른과 남편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서울역 화물칸을 타고 새벽에 신녕역에 내리니 국수를 삶아 주더라고 한다. 차 한대에 3가구를 태우고 인각마을에 내렸다가 덕치(화북2리)로 올라오니 부엌 없는 방 한 칸을 배정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인각, 화수1리, 덕치(화북2리), 넉덕(화수2리)에 각각 세를 얻어 살림을 하고 남편들은 화산에서 개간하였다. 12월이 되어서야 방, 부엌, 마루가 완공되자 가족들이 화산마을로 모두 이사를 옮겨 왔다고 한다. 개간을 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면 광목, 밀가루, 보리쌀 한 말, 간장, 된장, 낫, 괭이, 삽, 호미 등 1962년부터 3년 동안 지급을 받았다.

그 당시 고로 면장님으로 16대 정진동(1961년 7월 1일∼1962년 2월 27일) 17대 박유석(1962년 2월 28일 ∼1963년 1월 20일) 18대 박일용(1963년 1월 21일∼1964년 11월 9일)면장님으로 제직 하실 때였다.

서선열 할머니는 우리들 때문에 면장님과 면서기 양반들이 고생 많았제 간장 된장이 있었나? 배급을 주었기에 살아 나왔제 하시면서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지 라고 하시며 그 당시를 회상 하시는 듯하였다.

화산은 음력 9월부터 시작되는 추위가 유난히 견디기 힘들어 어떻게 살아왔나 싶은데 흐르는 것이 물과 세월만이 아닌 나의 청춘도 척박한 산을 개간하면서 다 보냈다 라며 긴 한숨을 토해 내시는 아흔의 할머니는 다시 들숨을 쉬시기에 버거운 모습이 묻어난다. 평생에 걸쳐 산지개간을 건설하는데 운명을 걸며 산은 결코 물을 넘을 수 없고 물 역시 산을 넘을 수 없는 원칙을 받아들이며 살아온 이분들이야 말로 玉井에 피어난 백련처럼 자연을 보존하게 만든 화산마을 주인공들이다.

이 글은 의흥 향우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창간호 발간에 축하를 드리며 올린 글입니다.
권상규 삼국유사면장님께서 전직 고로면장님 자료 제공에 감사드립니다.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