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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고향의 맛, 빨간 자두

admin 기자 입력 2021.08.03 23:38 수정 2021.08.03 11:38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며칠 전 고향에서 자두 한 상자가 왔다.
자두의 포장을 뜯는 순간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빨간색이 감도는 자두가 예쁘게 차 오르는 이팔청춘의 빰처럼 윤기가 흐르고, 탱글탱글하다. 대형 마트에 파는 과일들은 고향이 어딘지 명찰도 없고 독특한 냄새는 지워진 채 새로운 포장재로 단장하고 새치름하게 엎드린 채 진열되어 있다.

오늘 고향에서 직행차 꼬리표까지 달고 온 자두는 울긋불긋해 느낌부터 다르다. 자두색이 고향의 짱짱한 햇볕을 한 껏 먹은 듯 빨갛게 아로새겨져 있다.
자두를 기른 이의 지극한 정성과 애정, 고향 사람 아무개가 지었을 순정한 눈빛도 덤으로 가득 채워졌다.

고향 농산물이라는 것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것은 고유한 맛과 품질에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런 속성의 정서가 듬뿍 담긴 고향의 자두를 받은 셈이다.
사람과 사람 간에는 인연이라는 게 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맺어지고 얽혀가며 살아가는 존재다.

연으로 맺어지는 게 어디 사람과 사람뿐일까. 고향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의 만남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로 오래 전부터 고향 농산물인 쌀, 사과, 육족마늘과 양파, 고추 등 많은 농산물을 애용하고 이웃에도 적극 권유하고 있는 참이다.
자두를 먹다 문득 고향에서 유년시절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그립고 잊혀지질 않는 뜨거운 기억들이 떠오른다.

군위 의흥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으레 간고등어 한 손과 계절 과일을 푸짐하게 싸 주시던 어머니.

그 맛에 매번 오는 오일장을 기다리며 농사일에 어머니 도우려 들에 따라 다녔다. 어느 해인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의흥 남천방 건너 장미산 부근에 있던 우리 논밭에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떠오른다.

유채꽃 피고 지는 4월 지나 5월이 되면 누렇게 익던 보리 냄새를 생각하니 보리 까끄라기처럼 목덜미에 걸려 먹먹하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서러운 냄새, 배고팠던 가난의 냄새가 슬며시 젖어들어 냉가슴을 아리게 한다.

50년대 내 유년시절 잊고 덮어뒀던 마음 속 삶의 풍경화를 끄집어낸 듯하다.
너른 보리밭을 맨다고 새벽부터 이랑에 엎드린 어머니 얼굴에서 비오 듯 흘리내리는 땀방울을 연신 닦아내던 어머니 생전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마른하늘에 해는 길고 왜 그리 시간은 더디 가는지 보리밭은 매도 매도 끝없이 길어만 보이는 보리 이랑을 세어 보고 또 세어 본다.

허기진 배로 엎드려 있으면 이랑 끝이 천리 만리 까마득해 괜한 짜증으로 땀에 벤 머리 밑만 벅벅 긁어 됐다.

그렇게 가질 않을 것 같던 하세월에 보릿고개도 넘고, 내 인생의 아흔아홉 아리랑고개도 넘긴 지금, 이마엔 보리밭 이랑처럼 접힌 주름살에 마른 고랑이 허허하다.

이젠 꽁보리밥으로 배 채울 일도 없고 보리밥이 지겹다고 거들떠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찬물에 보리밥 한 덩어리 물에 말아 배를 채웠던 보리밥이 이제는 좋았던 기억만 더듬는 추억의 보리밥, 지금은 웰빙식으로 대접받는 별세상이다.

삶이 굽이쳐 모든 시간은 물빛 아련한 기억의 순간들로 솟아나 저만치서 손짓하는 듯하다. 오래 잊었던 친구 모습이 가슴에 잉잉 차오르 듯이. 과거 또한 강물처럼 흘러가버린 것 같지만, 언제나 철새처럼 돌아온다는 사실도 새삼 느껴진다.

어느듯 7월도 끝자락에 매달려 삼복더위 견뎌내랴 헉헉거리고 있다. 올해의 절반이 한여름 소낙비처럼 후두둑 떨어져 흘러갔다.

반이 지났다고 푸념하기보다 남은 절반을 어떻하면 유익하게 보낼까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란 항상 곁에 있으면 좋겠지만, 곁에 있지 않아도 그냥 그리운 사람, 그저 보고 싶은 사람, 전화하면 어이구! 반갑다고 내 이름 석자라도 용케 기억해 줄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아무리 바빠도 얼굴 한 번 보자구나 그깟 코로나가 뭣이라고 답답한 마음을 담아 전화라도 한번 해야겠다.

나이 들면 툇마루처럼 뒤틀리고 벌어져 보수공사도 못할만큼 낡아지면 폐품처럼 사라질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고향의 맛, 빨간 자두를 자주 먹어야겠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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