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가을이 오면

admin 기자 입력 2021.08.18 17:19 수정 2021.08.18 05:19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고3 마지막 가을 소풍 때다. 나락이 누렇게 물들어가고 논둑에는 밀짚모자에 헌 옷가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참새 떼를 쫓고 있다.

장수잠자리 두 마리가 나락 끝에서 날개를 폈다 오므렸다 하며 사랑을 구가한다. 우리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길 따라 먹을거리 싸 들고 멋쩍게 줄지어 간다.

나는 반에서 키가 큰 편이다. 줄지어 갈 때면 항상 맨 뒷줄에 선다. 오늘도 반 뒤에 서서 친구들과 같이 걸어간다. 여느 때와 같이 설렘도 없고 기분이 나질 않는다.

이 가을이 가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진다. 발걸음이 무겁고 마음도 착잡하다. 애꿎은 코스모스만 손으로 툭툭 치며 걸어간다.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보였다 숨었다 숨바꼭질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

그때는 학생 수가 적어 한 학년이 한 반이다. 3학년 전체 수가 사십여 명밖에 안 된다. 사십여 명 중 여학생이 여덟 명이다. 양호 선생님이 여학생과 같이 소풍 길에 오른다. 점심을 먹고 보물 찾기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한 친구가 말을 꺼낸다.

오늘이 고3 마지막 소풍이다. 우리 이렇게 놀 게 아니라 소주 한 잔씩 하며 기분 좋게 놀아보자며 분위기를 잡는다. 기분도 착잡한데 잘됐다 하며 그래, 한잔하며 신나게 놀자며 파이팅을 외친다. 감히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든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우리가 놀고 있는 장소에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구멍가게 하나 있다. 가게에는 눈깔사탕과 과자봉지 몇 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뒷 구석에는 45도 되는 안동 제비원 이란 상표가 붙은 소주 네댓 병이 있다. 그 옆에는 껍질이 채 벗기지 않은 땅콩이 마대에 담겨있다.

이것들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 친구 대여섯 명이 선생님 몰래 가게에 들려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온다.

점심 먹고 남긴 반찬을 펴 놓고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신다. 술을 먹어본 적 없는 나에게는 영웅심이 발동한다.

병아리 눈물만큼 마셨는데 머리가 빙 돌고 정신이 몽롱하다. 축 처져 있든 분위기가 사라지고 힘이 솟군 친다.

친구들 틈에 끼어 신나게 놀고 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한다. 똑바로 걷고 싶어도 다리가 풀려 발걸음이 제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는 필름이 끊긴다. 눈을 떠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난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꾸중 들을 거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머리가 띵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한 번은 넘어가야 할 산이라고 생각하며 황소걸음으로 학교에 간다. 긴장 속에 오전 수업은 무사히 잘 넘기는가 했더니 오후 체육 시간이다. 체육 선생님이 “야! 이리 와 봐.” 하며 날카로운 소리로 부른다.

어제 소풍 가서 소란 피웠던 그 일로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기가 죽어 고개를 떨어뜨리고 힘없이 걸어간다. 선생님은 찢어진 눈을 위로 치켜들고 나를 노려본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너 보고하는 말이구나 하며 호통을 친다. 같이 소란 피운 친구들은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숨죽이고 있다.

순간 잘못이 이렇게 큰 줄이야 생각도 못한다. 담임선생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어제 소란 피운 녀석들 다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다.

우리는 퇴학당할 줄 알고 마음 단단히 먹고 담임선생님 앞에 일렬로 섰다. 선생님은 얼굴을 붉히면서 딱딱한 출석부로 번갈아 가면서 한 대씩 때리고 선 “오늘부터 너희들은 퇴학이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며 불같은 호령을 내리신다. 우리는 퇴학이란 말에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아무 말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진한 우리는 퇴학되는 줄 알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화를 삭이지 못한 선생님은 이성을 잃으시고 닥치는 대로 집어던진다. 교무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놀란 우리는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하며 선생님 다리를 붙들고 울고불고하며 애원한다.

선생님도 우리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이날 이때까지 밤낮 가리지 않고 가르쳤건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기껏 이것뿐인가? 남들 보기가 부끄럽다. 하시며 목멘 말씀을 하신다. 심한 꾸중을 듣고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교무실 밖으로 나온다. 학교 뒷마당 느티나무 밑에 둘러앉아 이야기한다.

당시 대학에 붙는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우리가 대학에 붙어 선생님을 한 번 찾아뵙자고 약속했다. 졸업식 날 “선생님! 대학에 붙어 꼭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하고 헤어진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 금융. 교육. 법률 등 각 분야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나는 동물병원을 경영하면서 배움을 더해 수의학 박사를 받는다. 학위를 받던 그날 우리는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 “우리는 해 냈습니다. 그리고 약속도 지켰습니다.”하고 선생님을 껴안고 그때의 심정을 마구 쏟아내었다. 가을이 오면 고3 마지막 가을 소풍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