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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전화기와 처 조모

admin 기자 입력 2021.09.13 10:55 수정 2021.09.13 10:55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전화가 귀할 때였다. 한 동네에 한두 대 있을까 말까? 거의 없다.
전화하려면 우체국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마저 전화 요금이 겁나 마음 놓고 할 수 없다. “마누라가 좋으면 처가 말뚝 보고 절한다.” 그랬다. 처가에 전화 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

처가에는 장조모님과 장인어른, 장모님이 계신다. 장조모님은 이야기도 조리 있게 재밌게 하시며 사리에 매우 밝으시다.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은 장조모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

진료하고 돌아오는 길에 처가에 들리곤 한다. 인사도 드릴 겸 전화 넣고 싶다는 말씀을 장조모님께 드리고 싶어서다.

장조모님께서는 나를 볼 적마다 반가이 마중해 주시며 내 손을 꼭 잡아주신다. 뒷짐 하시고 손에 들고 온 달걀을 하나씩 주곤 하신다.

우리 집 조모님 같아 마음이 푸근하다. 전화 넣고 싶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 기회를 찾는다.

어느 날 장조모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다. 장조모님! 제가 장가들고 처가에 뭐 하나 하고 싶은데 뭐하며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웃으시며 대답이 없으시다. “전화 한 대 놓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역시 웃으시며 대답이 없으시다. 어떻게 하면 장조모님의 대답을 들을까? 궁리 끝에 말을 꺼낸다.

저녁 먹고 잠자리에 누우면 장조모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하면서 조용조용 말씀드린다.

장조모님께서 덧니를 드러내 보이시며 만족한 웃음을 지으신다.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장가들고 얼마 안 되었다. 장인어른께서는 농담도 잘하신다.
어느 모임 처에서 사위를 봤더니 ‘소침 챙이’를 봤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사위 잘 봤다고 하면서 한턱내라고 하더라 하시며 재밌게 이야기하신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 처가 곳에 진료하는 일이 많았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처가에 들러 전화 이야기하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녁 밥상이 들어온다. 장조모님 밥상이 들어오고 장인어른 밥상이 들어온다.
내 밥상도 따라 들어온다. 평소에는 장조모님께서 밥을 먹자고 하시는데 오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수저를 드신다.

밥을 먹으면서 장조모님 얼굴을 살핀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장인 얼굴에도 밝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큰일이 일어났는지 걱정하며 장모님 얼굴을 힐긋 쳐다본다.

사위 사랑은 장모님밖에 없다. 장모님께서 눈을 껌뻑이시며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신호를 주신다.

걱정되었다. 장조모님한테 전화 이야기를 잘못했던가? 깊은 생각이 든다.
잘못하면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냉랭한 분위기를 슬기롭게 풀어내야 한다. 장조모님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수저 놓으시는 것을 보고 숨 막힐 듯 조용한 공기를 깨뜨린다.

장모님께서 숭늉을 가지고 들어오신 것을 얼른 받아서 “장조모님, 물 드세요.” 하고 두 손으로 받쳐 올린다.

장조모님께서 받으시면서 말씀하신다. 큰집 작은집 손서가 아홉이나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나! 여태까지 삐아리 눈물만큼도 얻어먹어 본 적이 없다. 둘째 손서한테 물 한 대집(놋대접)이 받아먹는 것이 처음이다.

가슴에 맺혔던 치정이 쑥 내려간 것 같다 하시며 환한 얼굴로 말씀하신다.
그제야 장인어른께서도 기침하시며 어색했던 분위기가 금세 훈훈해진다.

며칠 후 장모님께서 자네가 들어서서 말한 덕분에 집안이 조용했다며 칭찬해 주신다. 장모님 칭찬에 어깨가 으슥했다.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조모님께 허락을 받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좋아하시는 간식을 사 들고 마당에 들어선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긴 담뱃대를 물고 담배 피우시던 장조모님께서 “권 서방인가” 하시며 내려오신다. 예전처럼 손을 꼭 잡아주시며 올라가자며 앞장서신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장조모님! 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 들이나 어서 말해 보게.” 하신다.

어느 때보다 음성이 부드러웠다. 마음을 졸이면서, “전화 한 대 놓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장조모님은 농담도 잘하시고 지혜로웠다. “권 서방이 언제 나보고 소리통(전화기)을 들여놓겠다고 했나? 듣는 게 처음일세. 들어놓지 말라고 했던 적도 없네. 들여놓고 싶거든 언제든지 들여놓게. 권 서방이 하고 싶은데 누가 말리나.”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처가 동네에 처음으로 전화가 들어갔다. 전화 없이 불편하게 살았던 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한 집에 몇 대씩 있다. 전화로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 전화 한 통화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소식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화상 전화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미국에 사는 자식한테 매일 전화가 온다.

전화 요금 올라간다며 하지 말라고 했다. 와이파이가 있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며 전화를 한다. 새로운 세상에서 걱정 없이 살아간다.

전화가 우리와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지내온 지가 1세기 훌쩍 지났다. 반가운 소식을 들을 때도 있지만, 전화금융사기로 슬픈 소식을 들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전화는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필요품이다.

이제 와 전화는 스마트 폰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서 총애 받으며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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