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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돈(錢)의 이중성(二重性), 빛과 그림자

admin 기자 입력 2021.10.19 11:13 수정 2021.10.19 11:13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화천대유란 알쏭한 자산관리사가 주술(呪術)을 부린건지 세상이 미쳐서 날뛰고 희한하게 돌아가니 요지경 속 같다.

전직 대법관, 검찰총장, 특검, 검사장할 것 없이 줄줄이 소환(召還)한다. 최고에서 말단까지 돈 되는 부동산 개발회사에 들어가 전관예우(前官禮遇)의 능력을 과시하기로 작당을 했나? 한국 사회의 엘리트 법조인들이 눈이 뒤집혀 일확천금에 뛰어들었다.

법률가는 자존심이 무엇보다 중요한 직업이다. 돈에 눈 멀면 앞 뒤도 보이질 않은 모양이다.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이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공익 환수 사업’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사업에서 민간 업자들이 천문학적 특혜를 얻고 설계자로 자청한 측근의 뇌물, 배임혐의까지 나왔으니 ‘최대 비리 사건‘으로 들썩거리고 있다. 닥쳐오는 토네이도처럼 뇌물의 거센 풍랑은 시작부터 사납게 휩쓸어버릴 기세다.

뇌물이란 무엇인가? 공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법을 어기고 자기를 이롭게 해 달라고 주는 돈이나 물건이다. 욕망이 삶의 동력이라지만, 욕망을 채울 마중물로 쓰여서는 안 될 돈이 뇌물이다. 돈이 뇌물로 쓰여지면 범죄의 씨앗만 틔울 뿐이다.

뇌물은 필시 암묵적 대가를 바란다. 그런 뇌물 속에는 치명적 낚싯바늘이 숨겨져 있다.
그 바늘에 꿰였다하면 끝장이다. 전직 대통령의 막내 아들은 36억원의 뇌물을 먹었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 아비는 범인데 새끼는 개자식이라 조롱했다. 어디 바늘 뿐이겠나. 독이 묻은 뇌물을 삼켰다간 비명횡사(非命橫死)한다.

근대사 한말(韓末)에 국기(國紀)가 극도로 문란해져 관직을 뇌물로 매매한 일들이 성행했다.
25대 철종에서 고종,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조 3대 60년 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勢道)정권은 썩을 대로 썩었다.

과거제는 허구적인 과거제도에 불과 해 초시(初試)도 매매하고, 진사(進士)도 금 석 돈에 살 수 있었고, 수령(守令)은 5만 냥, 관찰사(觀察使)를 급지에 따라 10~20만 냥으로 팔고 샀으니 뇌물 때문에 조선이 망조(亡兆)가 들기 시작했다. 구한말 우국지사 황현(黃玹)은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면 사실 이상한 것이다”라며 ’매천야록‘에서 과거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구한말(舊韓末) 궁궐(宮闕)이나 조정(朝廷)에서도 뇌물 스캔들이 분분했으니 왕조도 막장이다. 1904년 3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메이지(明治)천황의 선물이라며 고종에게 30만원을 줬다.

이듬해 11월에도 을사조약을 앞두고 고종은 일본 공사로부터 20만원의 뇌물을 또 받았다. 왕이 뇌물까지 받았으니 사헌부가 소환해야 했어야 할 터인데도. 또 이등방문은 대신들에게도 300만원의 거액의 뇌물을 나눠주면서 을사조약이 잘 체결되기 바랐다.

뇌물을 받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 오적(五賊)’들은 그 돈으로 많은 전답을 싸 졸부(猝富)로 살며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 바쳤다.

심지어 상여(喪輿)나갈 때도 뇌물을 줘야 망자의 저승길이 편해 진 것 같다.
향도가(嚮導歌)를 들으면 망자는 저승사자에게 이끌리고 쇠망치로 등을 치며 몰아가는 저승사자에게 뒷돈을 줘야 종이 뭉치로 대신 등을 친다.

저승 문턱에 들면 문지기인 우두마면(牛頭馬面)의 나찰(羅刹)들이 소매를 끌며 인정(人情)을 달라고 늘어진다.
염라대왕이 이승의 죄를 따질 때도 형리들에게 뒷돈을 건네야 고문이 느슨해지고 뒷돈의 액수에 따라 죄목이 달라진다.

뇌물이 상여 앞에 다발로 놓은 게 지전(紙錢)이다. 저승가는 길에도 지참금이 필요한 지경이였으니 이승의 뇌물 오죽 많겠나.
뇌물은 아닐지 몰라도 뇌물 비슷한 떡밥이란 게 있다. 흔히 낚시터에 가서 붕어가 모이라고 떡밥을 미끼로 유혹한다.

우리도 명절되면 신세 진 사람들에게 갈비나 생선, 과일 등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 또한 떡밥의 한 갈래다.

액수가 크지 않는 선물이라면 진한 감동은 없을테지만, 안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떡밥을 뿌리고 안 뿌린 낚시터의 조황(釣況)은 분명 다룰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명심보감에 ‘대하천간(大廈千間)’이라도 야와팔척(夜臥八尺)이요, 양전만경(良田萬頃)이라도 ‘일식이승(一食二升)’이니라 했다.

즉 ‘큰 집이 천 칸이나 되어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 자 뿐이요, 좋은 밭이 만 평 있어도 하루에 먹는 것은 두 되 뿐이라’했다. 적당히 갖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는 말일 성싶다.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도 “까닭없이 천금을 얻는 것은 큰 복이 있어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 재앙이 있게 되리라(無故而得千金, 不有大福, 必有大禍)”고 했다.

탐욕을 부리면 인간성은 사악(邪惡)해지고 해맑던 영혼은 시나브로 쪼그라든다. 비록 가진 것 없는 범부주생(凡夫衆生)의 삶이라 할지라도 가끔씩은 기분 좋게 일본 말로 ‘기마이’쓰면서 살았으면 한다. ‘오늘 밥값은 내가 낸다’든가 ‘이 자리 술값은 내가 몽땅 쏜다’며 지갑을 여는 소리처럼 반가운 일은 없다. 뇌물이 없는 사회에서 온 세상을 몽땅 사 줄 것처럼 기마이 있게 호쾌한 목소리 탕탕내면서 말이다.

황성창 시인
재부의흥면향우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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