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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천년 고찰을 찾아

admin 기자 입력 2021.10.19 11:16 수정 2021.10.19 11:16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고향 군위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두 군데 천년 고찰이 있다.
한 곳은 고로 화북 화산(華山)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각사(麟角寺)와 다른 한 곳은 인각사에서 군위의 젖줄 군위 댐을 지나 한참 더 올라가면 선암산 중턱에 있는 압곡사(鴨谷寺)이다.

인각사는 이름만 들어도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여기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고 입적한 곳이다. 사학에 밝지 못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지 못해 아쉬움이 든다.

어릴 적 어머니 따라 줄곧 군위 지보사(持寶寺)를 다녔으므로 인각사는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사람들이 군위에 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하며 웃음거리가 될 뻔했는데 운 좋게 잘 지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군위에서 약 백여 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가 본다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산수 초입에 어릴 때 기억을 더듬으며 인각사에 들렸다. 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지붕에 붙어있는 기왓장은 태풍이 불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거리고 있다.

벽에 두껍게 발랐던 흙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내려 모래알만 오다가다 붙어 있다. 앙상한 기둥만 남아 곧 무너질 것 같아 선 듯 절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넓은 절터에는 사람들이 밭으로 만들어 채소 등 온갖 농산물을 다 심어놓고 있다.
절의 모습이 서서히 잃어가는 거 같아 이러다가 혹시 절이 없어지지 않을까 여린 마음에 두려움마저 든다.

그러면서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역사를 이해하는 부족함도 있지만, 내용과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절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이곳 인각사에서 집필했다는 거를 알고부터는 관심을 더 가지게 되었다.

여느 날 동네 어른들과 같이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인각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 옛날 고로는 우거진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하늘만 빠꼼이 보였다. 절 옆을 지나 동네로 들어오는 길은 달구지(수레)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었다. 절을 믿는 사람이 없어서 스님이 계실 때 있고 안 계실 때도 있었다.

뼈대만 남은 절을 가리키며 곧 무너질 것 같다 하시면서 안타까워한다. 한숨을 내 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간다.

언제였던가 일연스님이 내려오셔서 절을 새롭게 수리하시고 입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이 없으면 사상누각과 같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여느 때 환경보호 캠페인을 벌이며 환경을 보호할 때였다. 늦은 가을 쌀쌀한 바람이 불 때 환경단체 40여 명 회원과 같이 인각사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그때, 보았던 허물어져 가는 절이 인각사라는 것에 깜짝 놀라며 감개했다.
인각사 이야기에는 일연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일연은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집필한 승려이다. 출생은 경북 경산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 본관은 경주이다.

법명은 처음에는 회연, 후에 일연으로 고쳤다.
학술계 등에서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집필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어디에서 저술했는지 저술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는 것에 의아했다.

일연은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었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하안소(下安所)를 인각사에 정하고 5년 동안 삼국유사를 집필하고 여기에서 입적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역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다. 우리와 함께 더불어 지내온 지 수천 년 훨씬 넘는다.
수천 년 역사 속에 압곡사(鴨谷寺)도 들어 있다. 압곡사는 창건 설화로 우리에게 관심을 주는 사찰이다.

압곡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있다.

의상대사가 인각사를 창건한 뒤 부속 암자를 짓기 위하여 자리를 물색하였으나 적당한 곳이 없어서 고심하던 중, 나무로 만든 오리를 하늘로 던졌더니 오리가 현 압곡사 있는 자리에 내려앉았다.

의상은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오리가 앉은자리라 해서 암자 이름을 오리 압(鴨) 자, 골 곡(谷) 자, 암자 암(庵)을 써서 압곡암(鴨谷庵)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새로 중창하거나 중수에 대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면 첫 번째 만나는 것이 일주문인데, 아쉽게도 일주문이 없다. 없는 것이 특이해서 유일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는 아담한 석등 두 개가 일렬로 나란히 서서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석등을 통과하고 돌계단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담한 압곡사가 반갑게 마중하고 있다. 큰 사찰처럼 너른 마당이 주는 위압감은 없다.

언 듯 보기엔 절이라 하기에는 결에 맞지 않을 정도로 농촌의 정겨움이 물씬 풍긴다.
마당 한가운데는 오래되어 보이는 석탑이 압곡사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앞에는 돌로 만든 석조에 돌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나무오리 두 마리가 고고하게 앉아있다. 오리 주둥이에서 물이 쉴 사이 없이 쪼르륵 흐른다. 양지바른 곳에 빨간 고추가 널어져 있고, 장독대 위에 가지런히 줄 서 있는 장독들이 가을 햇살에 윤기가 반지르르하다. 압곡사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물맛이 뛰어난 샘(泉)과 300년 이상 된 탱화 그리고 아홉 분의 선사영정(禪師影幀)이다. 아쉽게 탱화는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도난당했다. 수월당대선사, 의상조사, 사명당대선사 등 9분의 선지식(善知識) 영정이 유서 깊은 압곡사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듣기만 했던 압곡사를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보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거로 생각한다.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은 조용한 압곡사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지 스님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고 싶지만 부담스러웠다.

마당을 쓴 흔적이 있어 누가 있느냐고 몇 번이나 불러 봐도 인기척이 없다. 훗날 다시 오기로 하고 넘어가는 해 따라 압곡사를 내려온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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