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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슬픈 계절이다

admin 기자 입력 2021.11.03 10:34 수정 2021.11.03 10:34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가을이 바람을 타고 오는지, 상강 지나니 가을이 한창이다.
100대 명산 천성산 기슭에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소매 속으로 스며든다. 서늘한 아침에 풀잎마다 고인 이슬 방울이 영롱하다.

이슬은 가을이 돼서야 더욱 청량하다.
햇살이 나면 풀과 나무가 활짝 웃다가 태양이 구름 뒤로 살짝이라도 비켜서면 금방 시무룩해 진다. 가을바람 한 번에 초록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바람 한 번에 나뭇잎 노랗게 물들고, 바람 한 번에 자신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터뜨리는 단풍! 멀리 헤어져 사는 죽마고우가 그리워지는 또 한 번 닥아오는 가을이 마냥 서럽기만 하다.

천고마비의 계절,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높은 하늘에 얼 하나 없다. 물든 하늘색이 코발트랄까, 남색이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다. 흔히 말하는 가을의 표상은 ‘말이 살찐다’ 하였다.

수확이 넘쳐나는 가을이라 마소 먹이가 흔해서 하는 말일 거다. 일년 내내 짐 나르랴 밭갈이 하랴 일만하는 말도 살이쪄야 하고 소도 살쪄야 하겠지만, 우선 겨울 나기할 사람도 윤기나는 쫀듯한 햅쌀밥에 살이 쪄야 하지 않겠나.

며칠 전 도시에서 쉬이 볼 수 없는 감나무를 봤다. 가을을 실감케 하는 감나무를 쳐다보면서 어릴 적 시골 생활의 추억 중에 기억되는 풍경이 떠오른다. 잎이 반이나 떨어진 감나무에 세월의 무게를 껴안고 달려 있는 감이다.

감은 다른 봄꽃과 달라서 요란하게 꽃을 피우지 않는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열매 맺어 가을에 익는다. 감나무는 수세도 아담하고 잎이 진 뒤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아취(雅趣)도 풍긴다.
가을은 벌레 소리에서도 익는다.

나뭇잎이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는데 어디선가 늦털매미가 ‘씨~익’하고 길게 울다 ‘씩 씩 씩 씩’하고 가쁘게 그리고 짧게 우는 소리는 한 여름철 어느 매미들보다 처연하다.

또 풀섶이고 섬돌 밑에서 서늘한 울음 소리로 가을을 알리는 그들은 여치고 귀뚜라미들이다. 바람에 구르는 낙엽을 보고 시든 잡초 속에 거미줄보다 가느다란 벌레 울음 소리를 들으려니 영락 없이 가을이다.

스산한 가을 바람에 풀과 나무가 깊은 생각을 멈추고 수건거린다.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정든 가지를 떠나 땅에 떨어져 뒹군다.

천성산 계곡따라 천년의 목마름을 축이며 동해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는 회야강(回夜江)에는 자란대로 자란 갈대들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은빛으로 너울거린다.

성숙은 아름다우나 어쩐지 쓸쓸함이 감돈다. 밤이면 하늘의 휘장(揮帳)을 연 찬란한 별들이, 그 별빛에 어스레한 하현달이 차갑게 눈웃음 짓고 있다.

19세기 화가 밀레이의 그림 제목처럼 가을은“떠나보내고 싶지 않는 가을이다” 두보는 만리타향에서 유랑객으로 맞는 슬픈 가을(萬里悲愁常作客)을 노래했으며, 한유는 추회시(秋懷詩)에서 자기 인생을 빗대어 가을 날의 긴 밤과 짧은 낮을 한탄했다.

문객(文客)들에겐 가을은 슬픔의 계절이다. 선비들은 낙엽을 보면서 덧없는 세상에 또 한해가 기울고 자신들은 초라하게 늙어가는 것에 대해 서글픔을 품은 것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온통 가을이 물든 빛에, 소리에, 가을 향기에 가득찼다.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을은 윤동주의 시구처럼 작은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계절이다.
천하의 문장객들은 이렇게 가을을 타는데, 우리라고 버틸 재간이 있을까. 가을을 붙잡고 싶은 시간, 이 가을을 어찌 보내란 말인가?

북쪽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 단풍이 천성산까지 왔다는 소식에 새삼 세월의 빠름을 느꼈다. 단풍은 자신의 때에 맞춰 어김없이 오고 가야할 길을 가는가 보다. 기다려주는 법 없이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은 단풍만도 아니다.

인생도 단풍 같다. 짧으면서도 형형색색이다. 다리는 줄기 같고, 팔은 가지 같고, 얼굴 피부는 점박이 단풍 같이 얼룩 덜룩이다.

단풍을 보면 아름다움 뒷켠에는 남 모르는 고통도 따랐을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비우고 마음을 덜어내며 알몸이 되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평생 희노애락을 싣고 다투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벌그무레하게 물드는 단풍처럼, 하늘을 나는 기러기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황성창 시인
재부의흥향우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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