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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우리 삼촌, 금창섭을 그리며

admin 기자 입력 2021.11.03 10:39 수정 2021.11.03 10:39

↑↑ 금교원 씨
ⓒ N군위신문
성묘 철이 돌아오면 애틋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전쟁과 가난이 이 땅을 유린하던 시절, 창섭 삼촌은 그 두 개의 큰 파도에 휩쓸려 수평선 저 너머로 떠나갔다.
한참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어야할 열여덟의 나이였다.

지금 특별히 그를 그리고자 한다. 이는 창섭 삼촌의 형제자매 일부가 생존해 있을 때, 창섭 삼촌의 조카들마저 기억 상실증에 빠지기 전에 그의 족적을 기록해 두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기록을 넘어 해방과 6.25전쟁을 전후로 한 우리 민족사를 대변하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삼촌은 1931년 경북 군위군 산성면 운산동(새마아)의 한학자 금병문과 도영순 사이의 4남2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일제 치하의 산성소학교에 입학해 6년 간 선두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영특했다.

당연히 상급 학교로의 진학을 꿈꾸었지만 찢어지는 가난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당시 산성소학교의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은 창섭 삼촌의 맏형인 나의 선친(금민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철도 공무원의 빠듯한 월급으로 부모님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선친은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 소학교 교장은 경주 문화중학교 입학원서를 가져와 선친에게 전달했다. 결국 선친은 창섭 삼촌의 유학을 결정했다. 더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집안의 희망을 키워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삼촌은 우수한 성적으로 문화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자취를 하면서도 성적이 일취월장했다. 2학년 2학기부터는 학년 최고의 성적으로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삼촌 앞에 펼쳐진 운명은 가혹했다. 졸업을 앞둔 5학년 1학기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학도병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일등중사의 계급으로 참전한 삼촌은 동부전선 화천 전투에서 결국 산화하고 말았다.

삼촌의 유해나 유품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등중사 특진의 명예만 남아 그의 빈자리를 메웠다.

가족 뿐 아니라 그의 명석함을 아는 면내, 문중까지도 창섭 삼촌의 죽음을 비통해 했다. 삼촌에 대한 기억은 조부모님이 작고하시면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부 유해발굴단이 발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맏형인 선친은 즉시 DNA 등록을 했다. 그러나 선친이 세상을 떠날 때(2017년)까지도 유골 수습에 대한 낭보는 없었다.

삼촌의 흔적은 현충원 위패실에서 이름으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를 기억하고 연모하던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집안의 자랑이었던 삼촌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맏조카로서 시간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진다. 현충일에 현충원에 들러 행하는 헌화와 분향이 삼촌에 대한 유일은 예와 효의 표현이다.

하루빨리 유골이 수습되어 삼촌의 부모형제가 잠들어 있는 선산 옆자리에 묘소라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다음 성묘 때에는 삼촌도 함께 조카들의 절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창섭 삼촌, 가족의 품으로 얼른 돌아와 주세요.

글: 조카 금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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