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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천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admin 기자 입력 2021.11.17 00:00 수정 2021.11.18 12:00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최치원은 857년 신라 말엽 서라벌 사량부 반월성 남쪽에서 태어났다.
자는 해운(海雲)이며 호는 고운(孤雲)이다. 최치원은 12세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빈공(賓貢)으로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 유학한 천재다.

최치원은 유학 6년 만인 18세 나이에 당나라 국자감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여 2년 후 약관 20세에 당나라 관리로 양주 율수현 현위(縣尉)로 등용되었다.

이어 880년 23세에 종사관(從事官)을 거쳐 오늘날의 서기관급인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고속 승진한 풍운아 같던 관료였다.

그러던 885년 혼란스러운 신라 말엽의 정국을 수습할 개혁적인 인재의 필요성을 느낀 49대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귀국을 요청한다.

때마침 부친의 사망 소식도 듣게 되어 유학 18년 만인 29세에 급기야 귀국한 것이다.
귀국 후 최치원은 당나라의 유학 생활과 관직에 있을 때 자신이 기획하고 실행했던 각종 공문서와 수많은 시문(詩文), 당나라의 역사적 사실 관계, 정치와 사상 및 문화를 알리는 데 중요한 자료들을 망라한 최치원의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을 현강왕에게 바쳤다.

계원필경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도 삼사 백 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문자 보고(寶庫)다.

이에 기뻐한 현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이란 막중한 관직에 임명한다.

즉 ‘궁내에서 유교 경전을 강론하는 직책과, 임금의 명을 받아 조서(詔書)를 작성하고, 왕의 직속 군정직과 과거제도와 학문을 총괄하는 4가지 직책을 한꺼번에 내린 벼슬자리이다.

이런 중책을 헌강왕에서 정강왕, 51대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3대 왕조에 걸쳐 4년간 봉직했다.

894년 진성여왕 8년 최치원은 신라 말엽의 국정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그의 정치개혁안 ‘시무십여조(始務十餘條)’를 작성해 여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의 썩어빠진 골품 귀족체제의 저항에 부딪혀 신라 천 년 사직을 이어 갈 정치개혁을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자 최치원은 과감하게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후 부산 해운대, 양산 임경대, 합포 월영대 등의 유적지를 주유하면서 헝크러진 마음을 시문으로 남겼다.

중세기에 좌절한 지식인의 지성(知性)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 최치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운(靑雲)을 꿈을 꿨던 그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구름처럼 떠돌다.
어느날 가야산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온 최치원은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이란 칠언절구 4행시를 남기고 신선(神仙)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때가 924년 그의 나이 예순여덟이다.
승호막도청산호(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청산 좋다 말하지 마오
산호하사갱출산(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다 면서 무슨 일로 산을 나왔는가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踪跡) 두고 보오 다른 날 나의 종적을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테다.

고운(孤雲)은 외롭게 떠도는 구름 같은 삶을 바랐던 것일까? 신라 천하의 천재가 보헤미안처럼 산천을 유랑(流浪)한다는 게 얼마나 처처(凄凄)하고 처절(悽絶)했을까. 비록 그의 묘연한 흔적은 찾을 수 없겠지만, 천 년이 지나서도 그의 영혼은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최치원이라는 이름에는 동국(東國)의 문종(文宗), 우리나라 문인의 시조(始祖)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붙는다.

문인으로 천 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 문학의 일정한 형식과 수준을 다듬었고, 그것을 후대에 전수함으로써 문학적 전통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고려 8대 현종은 최치원을 동방의 학문과 유학의 창시자로 칭송하며 문창(文昌)으로 추대하여 ‘문창후(文昌侯)최치원’이라는 시호를 추시(追諡)했다.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와 목은 이색(李穡)은 최치원을 ‘동방학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조선의 문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퇴계 이황(李滉)은 고운을 중국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에 버금가는 ‘조선의 시선’으로 평가했다.

문신 이언적(李彦迪)도 “고운의 학문과 식견, 소행이 가위 ‘백세지사(百世之師)’라 찬탄했고,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살았던 소놀 노상직은 최치원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문학과 학문이 싹틀 수 있었고, 삼천리에 ‘동방예의지국’의 문화풍속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했다.

최치원은 신라 말엽을 살았던 역사적 인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해서 조선왕조실록 등 역대의 문헌과 기록에 이름이 빛나고 있다.

고운 최치원의 일대기가 대문장가로서만 끝난 것이 아니고 개혁을 주창한 참신한 목민관로서, 또 세상을 다스린 걸출한 경세가(經世家)로서도 명성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신라 최고의 천재! 고운 최치원이 남긴 찬란한 문학적 업적과 지성이 뛰어난 개혁적 충절 정신은 우리들과 후세에도 연면(連綿)하게 이어 질 것이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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