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겨울이 동심을 부른다

admin 기자 입력 2021.11.18 00:04 수정 2021.11.18 12:0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계절은 수레바퀴다.
상강(霜降)이 지나기 무섭게 논밭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며 두꺼운 옷 생각이 난다. 나무들은 겨울 채비하느라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사방으로 뻗어 있는 갈고리 발을 따뜻하게 덮어 준다.
겨울은 개구쟁이들의 세상이다.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꺼내 하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녹슨 스케이트 날을 땅바닥에 대고 문질러 반짝반짝하게 한다.

스케이트 위에 덜렁 앉아 찾아오는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이 생각 저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큰 거렁이 있다. 겨울이면 작은 거렁이 있어도 비좁아 신나게 놀 수 없어 큰 거렁으로 모여든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편을 갈라 스케이트로 박치기, 밀치기도 하며 배고픈 줄 모른다. 또래들의 모습은 세상 어디에서 볼 수 없다. 얼굴은 밤사이에 쥐가 몇 마리나 오르락내리락했던지 모른다.

소매 끝은 코를 닦아 기름 발라 놓은 것처럼 번질번질하다. 손등은 때가 새까맣게 눌어붙어 피가 난다.

홑바지에 바늘로 듬성듬성 궤 맨 양말을 신고 벌벌 떨며 겨울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당시의 삶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누구 하나 싫어하거나 꺼리지도 않았다. 그려니 생각했다.
여느 때와 같이 수십여 명 또래가 앉은뱅이 스케이트 와 ‘제트 비행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얼음 타러 갔다.

한국전쟁을 겪은 10대들의 놀이는 전쟁놀이가 단연 1위였다. 얼음 위에서 두 패로 나누어 앉은뱅이 스케이트 타고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다.

앉은뱅이 스케이트에 달린 ‘제트 비행기’로 상대편 스케이트 옆구리를 날쌔게 들이 받아 넘어뜨리게 하는 놀이다.

겨우 내 전쟁놀이를 하면서 또래들의 전략은 날이 갈수록 비상했다. 제트 비행기 앞에 대못 한두 개를 박아 공격하는 것이다.

이에 질세라 나는 세 개를 박아 공격했다. 나를 이길 또래는 아무도 없었다. 얼음 위에서 같이 웃고 떠들고 하면서 하루를 보내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전쟁놀이하면서 이기려고 용 써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얼굴은 홍당무 같고 몸은 땀에 뒤범벅이 된다. 해가 넘어갈 무렵 스케이트를 둘러메고 집으로 왔다.

어린 나이에도 얌체는 있어 하루 종일 놀고 집으로 들어가기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스케이트를 아버지 눈에 띄지 않는 데 숨겨두고 방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아버지가 헛기침하시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이 얼음 타는 데만 정신을 쓰는구나.” 하시며 야단치셨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왕 매를 맞을 거라면 일찍 맞는 것이 편했다.

그 후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확인하고 집에 들어갔다.
궁지에 몰리면 좋은 것은 보이지 않고 나쁜 것만 눈에 보인다. 피해 나갈 궁리만 늘어났다.
한 번은 날이 저물도록 얼음을 타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줄 알고 마음 놓고 들어갔다.

아버지가 방에서 새끼를 꼬고 계셨다. 깜짝 놀라 가슴이 쿵덕쿵덕하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아버지한테 꾸지람 들을 각오하고 조용히 앉았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새끼만 꼬고 계셨다. 꾸짖든지 화를 내시든지 하시면 마음이 편안할 텐데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찔할 바를 몰랐다.

삼추(三秋) 같은 시간이 지난 뒤 말씀하신다. “저녁에 소죽 끊이고 여물을 퍼다 줘라” 하시면서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평소 같으면 야단치시고 머러카고(꾸짖다. 나무라다) 했는데 조용조용하신 말씀에 궁금하고 불안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포근했다.
열댓 명 또래들이 끌어 모였다. 한 녀석이 날씨도 포근한데 스케이트 타려 가지고 한다. 큰 거렁은 약간 멀고 해서 작은 거랑에 가기로 한다. 여느 때와 같이 스케이트를 둘러메고 신나게 작은 거렁에 갔다. 날씨가 포근해 얼음이 살짝 녹았다. 얼음은 여럿이 같이 올라가면 쑥 내려갔다 올라오고 했다.

그 위를 지날 때면 약간 내려가는 느낌이 있어 재미있었다. 일렬로 줄지어 타고 다니며 즐겼다. 재밌게 차례대로 그 위를 지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얼음이 탄력이 있어 그 위를 지나면 수~ 욱 내려갔다, 금방 올라오고 한다. 차츰차츰 탄력이 떨어져 한 번 내려가면 올라오는 속도가 처음보다 느리다.

내 차례가 되었다. 엉덩이를 높이 쳐들었다 내려오는 반동을 이용하여 힘껏 눌렸다. 살얼음이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지직거리며 깨지고 말았다.

물에 풍덩 빠져버렸다. 잽싸게 빨리 나왔지만, 한쪽 바짓가랑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누가 성냥을 가지고 왔던지 방천 둑에 불을 지핀다. 불꽃이 잔디를 태우면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어른들이 보면 불 장난한다고 야단치신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옷을 말린다.
어찌 이를 수가! 지난밤에 오줌 누러 가다가 등잔 대를 넘어뜨려 석유가 내 바짓가랑이에 묻은 거를 깜박 잊고 옷을 말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헝겊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뒤를 돌아보니 내 바짓가랑이에 불이 붙었던 것이 아닌가.

또래들이 달려들어 겨우 불을 끗다. 그만 왼쪽 바짓가랑이가 불에 타 구멍이 커다랗게 났다. 맨다리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머니가 꾸짖을까? 봐 가슴을 두근두근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어머니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멀찍이 떨어져 먹는다.
어머니 코는 속일 수 없었다. 어디에서 헝겊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시며 내 곁으로 다가오신다.

한쪽 바짓가랑이가 불에 타서 맨다리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시며 “야 이놈아! 불에 타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큰일 날 뻔했다.” 하시며 새 옷을 내주신다. 동심을 부른 겨울은 이것뿐만 아니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