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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쪽박샘

admin 기자 입력 2021.12.06 10:59 수정 2021.12.06 10:59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산골짝에서 흘러내리는 도랑물이 우리 집 축대를 한 번씩 들이박고는 어디론가 흘러간다.
축대 끝에는 수십여 년 묵은 향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기품을 자랑하며 향기를 품어내고 있다. 그 밑에는 긴 세월 동안 온갖 풍진을 겪으면서 지내온 쪽박 샘이 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집 뒤 바위 끝자락에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바가지에 시달려 바위가 닳아 쪽박같이 생겼다 하여 쪽박 샘이라 불렀다.

쪽박 샘은 물이 펑펑 솟아오르는 우물처럼 나오지 않지만, 날이 가물 때 우물은 말라도 쪽박 샘은 마르지 않았다. 살아 숨 쉬는 생명수같이 어디에서 흘러들어오는지 아무도 모르게 채워지곤 한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이면 손이 시릴 정도로 물이 차갑다는 소문을 듣고 땀띠 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몸을 식히려 등물을 하면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어릴 때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가 보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살포시 찾아온 봄을 맞으며 얼었던 마음을 녹여준다.

개나리, 목련 등 봄의 화신들이 향나무 주위를 수놓으며 봄 잔치 준비에 열을 올린다. 시커멓게 된 눈 녹은 물도 유리알같이 깨끗하게 한다.

터널 같이 긴 우물에 목을 길게 빼서 유심히 들여다본다. 조그마한 둥근 면경 안에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꽃과 나비 등 온갖 것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가? 그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2백여 호 넘는 우리 동네에는 공동우물이 두 개 있다. 윗마을에 하나 아랫마을에 하나다. 도랑 가에 붙어있는 쪽박 샘까지 치면 세 개다.

윗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너무 얕게 파서 갈수기 때가 되면 언제나 물 걱정한다. 가뭄이 계속되면 물 부족으로 두레박 싸움도 일어난다. 그로 인해 인정을 비 꿀 때도 있다. 샘물이 딸릴까 봐 이른 아침부터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나르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 놓는 것이 아침일 거리였다.

봄이면 어머니는 쪽박 샘 안에 먼지와 겨우내 쌓인 낙엽들을 말끔히 청소하신다. 군데군데 시퍼렇게 낀 청태도 깨끗이 닦아내고 향나무 주위에 죽은 나뭇가지며 풀들을 베어내고 말끔하게 하신다. 청소가 끝나면 언제나 두 손 모아 합장하시고 “부처님! 올해도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하며 기원한다. 부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어머니의 소원을 늘 들어주셨다. 동네 우물이 다 말라도 쪽박 샘은 마르지 않았으니까.

가뭄이 심한 여름이면 쪽박 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어머니는 신경이 쓰인다. 쪽박 샘은 동네 우물이 아니고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때가 되면 시원한 물을 가져가려고 아주머니들이 주전자 들고 줄을 선다. 한 번은 이웃 아주머니가 쪽박 샘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퍼 가버렸다.

어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며 노발대발하셨다.
공동 우물은 시원하지도 않고 맛도 덤덤해 사람들이 물 가지려 거의 가지 않는다. 어머니는 가뭄으로 물이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며 늘 쪽박 샘에 관심을 가졌다.

가을이면 쪽박 샘은 울긋불긋 오색단풍으로 곱게 단장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청옥과도 같이 맑은 샘물은 푸르다 못해 거무스레하다.

사랑의 비밀을 고이 간직한 마음속까지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거추장스럽게 걸친 옷을 홀랑 벗어던지고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잡아당긴다. 한여름 물 때문에 인정 비꾸었던 아주머니들도 해맑은 웃음 지으며 길어가는 가을을 더욱더 그윽하게 한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 살찐 말은 제 몸을 추단 못 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없다. 얼음장같이 차갑던 쪽박 샘물이 넘어가는 해를 붙잡고 같이 가자며 손을 내민다.

뜨겁게 달 꿨든 햇볕도 쪽박 샘 향나무를 지킬 힘을 소진하고 서서히 식어 간다. 향나무도 바싹 마른 가시를 하나둘 떨구기 시작한다. 겨울이 고개를 쳐들고 슬며시 찾아온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오늘 아침은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입김이 서리고 귀도 시리고 손도 시려 벌써 사람들은 물 걱정한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면서도 유독 동갑내기 이웃 모친 하고는 잘 지내지 않았다. 어느 날 밤중에 어머니가 쪽박 샘에 물 길으러 갔다가 샘물 한 방울도 없어 빈 물지게 지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화가 나서 캄캄한 밤중에 언성을 높였다.

“이놈의 욕심쟁이 할망구!!”
며칠 후 고요한 한밤중에 물동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놀라서 밖으로 나가셨던 어머니가 들어오시며 혀를 끌끌 찼다. “그놈의 할망구가 이 야밤중에 샘물을 한 동이만 퍼 가면 되지 욕심스럽게 두 동이를 퍼 가다가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졌다고 한다.

어릴 때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가 보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소설 같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다.

어머니와 이웃집 모친과의 쪽박 샘에 얽힌 사연은 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거와 같다.
어느 거는 이웃사촌이라 하는데 화해해서 지금쯤 두 분께서는 먼 나라에서 알콩달콩 재밌는 쪽박 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으려나?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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