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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을 이끈 혁명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admin 기자 입력 2022.01.03 21:46 수정 2022.01.03 09:46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새 왕조를 이끌어낸 혁명가다.
1337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정도전은 성리학을 받아 드린 개혁 신진사대부였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직제학이라는 중앙 관리였으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보잘것없는 배경은 정도전의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수모를 격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따돌림을 받은 일상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역성(易姓)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 같다.

정도전은 미천한 집안 신분 탓에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항상 주변 세력으로 머물러야 했다.1360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에 붙어 충주사록을 지냈다.

그후 성균관에서 유학을 강론하고 1371년에는 태성박사에 임명되면서 5년 간 전선을 관장하기도 했다.

고려말 중국 대륙은 명나라 시대였다. 1374년 9월 친명 외교와 개혁정책을 실시하던 공민왕이 친원(親元)파에 의해 살해되고 친원파들이 권력을 잡았다. 고려의 멸망은 친원파와 반원파의 대립에서 시작되고 끝을 냈다.

1375년 권력을 잡은 친원정권은 친명(親明)파인 정도전에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라는 집권세력에 맞서 저항하다 피끓은 서른 셋에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살을 맞대고 살던 한 농부가 정도전을 보고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나 민생의 근심 걱정, 시정의 옳고 그름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챙기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자극받은 정도전은 나라를 확 바꾸고 백성을 구제해야겠다는 위민의식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2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낙향하여 칩거하는 동안 성리학을 동문수학했던 정몽주가보내 준 맹자(孟子) 한 질을 받았다.

혁명서와 다름없는 맹자를 읽다보니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철학적 통치이념과 깊은 사색에 잠겼다.

정도전이 읽은 맹자는 군주가 민심을 잃었을 때 역성혁명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념적인 사상이었을까? 맹자는 왕들 앞에서 “폭군을 죽이는 것은 시해(弑害)가 아니라 사내 놈 하나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백성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를 얻으면 제후가 되니 제후가 사직을 어지럽게 하면 제후를 바꾼다”는 역성혁명이론에 감탄하여 새 왕조 창업에 꿈을 키우게 됐다.

그래서 정도전은 고려 변방 군지휘관을 맡고 있는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는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한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변방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이성계에게 정도전은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을 거듭해서 역설했다.

정도전의 설득과 혁명논리가 전쟁터만을 전전했던 이성계의 처지와 상통하면서 두 사람의 동병상련이 이심전심으로 통해 결국은 조선 건국을 위한 혁명의 동지가 되어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다. 그게 조선이다.

1392년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이 주창한 역성혁명의 실천과제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정도전은 우선 조선의 통치 시스템과 철학이 담긴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혼란한 민심 수습을 위해 1394년 10월에는 한양으로 이전할 궁궐 공사의 일부가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도읍지를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상 및 이념, 병법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사회 개혁의 바람이 일어났다. 부패한 고려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던 정도전은 이성계란 인물을 찾아 자신이 꿈꿨던 역성혁명을 현실로 이뤄냈다.

이어 려말선초(麗末鮮初)에 만연했던 부패청산 작업에도 착수했다.
권문귀족들의 사병혁파(私兵革罷)에 우선을 뒀다. 이에 결사반대한 세력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다.

정도전의 위세가 날로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이가 사병을 시켜 선수를 쳐 정도전을 체포한다.

이유는 이복 동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한씨 소생 방원 등 다섯 형제들을 다 죽일 모의를 했다고 정도전, 남은 등에게 올가미를 씌운 후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 이때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그후 세자 방석을 폐위시키고 방번과 함께 유배시켰다가 후일 자객을 보내 살해한다. 조선 개국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한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1398년 8월 26일 태조실록)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자랑했다.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웠다고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질투와 시기심을 유발해 결국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 건국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조선시대 내내 만고역적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너무 각박했던 것이 아닐까? 태종(이방원)이 권력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의도적인 매도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 태종실록에는 부정적인 면을 실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죽고 467년이 지난 1865년 당시 고종은 경북궁 중건을 기념해 정도전의 신원을 복원(復元)했다.

사유는 정도전이 경북궁 궁궐을 짓고 모든 정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頌祝)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1865년 9월 10일, 고종실록).

삼봉 정도전은 비록 600년 전 역적으로 낙인 찍힌 역사의 인물이지만, 민본주의라는 독보적인 통치철학으로 조선을 세운 개혁 공신으로, 역성혁명가로 그의 이름은 천추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다.

임인년(壬寅年)에 나의 간절한 소망이 하나 있다. 다가오는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 지도자들 중 정도전처럼 깃발을 높이 든 역성혁명을 반면교사로 나라를 통합하고 질서 있는 일류국가로 만들어 낼 품격 높은 대통령.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봐도 될 온 국민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대통령이 뽑혔으면 좋겠다.


황성창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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