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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값

admin 기자 입력 2022.01.20 10:20 수정 2022.01.20 10:20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세상에 공짜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주고받고 하는 거는 일상화이지만, 때로는 걸맞은 대가가 따르기도 한다. 꼭 그러한 것만 아니지만,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들여다보면 겉으로는 예사로이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아닐 수 있다.

아버지는 정원사가 정원수 가지를 자르고 비틀고 철사로 옭아매어 보기 좋게 다듬는 듯이 저를 그렇게 키우지 않으셨다. 마음속으로 무한한 사랑을 하시면서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시며 이래저래 강요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발자취 따라 커 온 나는 모름지기 아버지의 모습대로 닮아갔다.

새해 첫날, 우리 가족은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기 위해 작은 상에 술과 안주와 과일을 차린다. 큰방에 아버지 어머님을 모시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식구들은 대청마루에서 세배를 드린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 어머님께 약주 한 잔씩 올린다. 어머님은 술을 잡수지 못해 식혜를 드린다. 방에 들어가서 형제자매가 빙 둘러서서 세배한다. 설 이튿날, 동네 어른 집에 인사하려 다닌다.

아버지는 굳은 손가락으로 헤아리면서 철수 집, 영수 집에 인사드리고 오라고 하신다. 인사하러 갈 때면 내가 옷을 잘 못 입었을 갈까 봐 살펴주시는 자상한 면도 있으시다.

4, 5학년 때부터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했다. 처음에는 멋쩍고 서먹서먹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찾아뵙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서먹서먹한 것도 없어졌다.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려 가면 세뱃돈을 주시는 어른도 계시고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시는 어른들도 있었다.

처음 세뱃돈을 받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다음 해 인사하러 가도 또 세뱃돈을 주셨다. 차츰 영수네 집 아버지한테 인사하러 가기가 싫어졌다. 흡사 세뱃돈 받으러 가는 거 같아 어린 마음에도 부담스러웠다. 그 후 난 영수 아버지한테 세배하러 가지 않게 되었다.

정월 대보름. 난 영수 아버지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영수 아버지가 “올해는 왜 인사하러 오지 않았지?” 하시며 미소 지은 얼굴로 말씀하신다. 잊었다고 할 수 없고 그대로 말씀드렸다. “영수 아버지께서 세뱃돈을 주시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 내년에는 안 주마 다녀가거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서도 나는 설날이 되면 세뱃돈을 주신 영수 아버지가 생각난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을 모르고 지냈다. 두 분께서 돌아가신 날짜는 제사를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할머니 사랑도 모르고 지낸 나는 길거리에 다니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우리 할머니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난다.

처가에는 처조모님이 계셨다. 금방 보아도 우리 할머니는 보지 못했지만, 우리 할머니와 같을 거로 생각했다. 아버지의 참 모습을 보며 살아온 나는 처조모님을 우리 집 할머니처럼 모셨다.

설이 되면 세배하고 세뱃돈을 봉투에 넣어 드렸다. 조모님의 활짝 핀 얼굴이 너무 평안해 보였다. 한두 해 지나면서 조모님과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세배 드리고 여느 때와 같이했다. 조모님께서 두툼한 봉투를 열어보시면서 지난해는 무척 바빴구나. 봉투가 제법 두툼하구나! 농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할머니 사랑에 메마른 나는 눈시울이 붉혀졌다.
나는 조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처가를 드나들고 했다. 들릴 적마다 조모님은 나를 반가이 맞아 주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조모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조모님 주머니에는 내가 드린 세뱃돈을 쓰지 않으시고 꼬깃꼬깃 접어 두셨다.
아직도 돈에는 할머니 체취가 묻어난다.

살아생전 조모님 품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조모님 무덤 앞에서 조모님! 제가 드린 세뱃돈을 아끼지 마시고 친구분들 모시고 맛있는 거 사 잡수고 하세요. 내년에 또 드리겠습니다. 조모님의 사랑을 한 몫 받아온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세월이 멈추지 않고 누가 부르는 듯 빨리 지나간다. 장가들이고 며느리를 보았다.
설날 아침 조용하던 집이 시끌벅적하다.
손자 녀석이 엄마 손 잡고 아장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엄마 아빠가 절하는 걸 보고 따라 한다.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머리를 방바닥에 들이박고 꼼짝하지 않는다. 방 안에 웃음꽃이 만발한다. 벌떡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엄마 품에 덥석 안긴다.

손주 녀석의 천진한 모습에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티 없이 맑은 세상에 누가 새까만 얼룩을 남기랴. 웃음꽃이 시들어지지 않고 영원히 아름답게 피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부모 품속을 떠나 새 보금자리 만들어 서로가 위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스럽다며 지갑을 연다. 며느리 절은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이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시아버지란 명분에 본분(本分)은 다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어멈아! ‘절 값이 적더라도 서운해하지 말거라, 내 마음을 온전히 전 한 거란다.’ 하면서 봉투를 건넨다. 예, 잘 쓰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답한다. 휘경아! 네가 벌써 대학 3학년이구나! 그동안 공부하면서 짬짬이 시간 내어 동생 돌 보느라 고생 많았지?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하려무나. 할아버지가 다 해 주마 봉투를 준다.

똥구멍을 하늘로 치켜들고 머리를 방바닥에 처박고 인사하던 녀석이 초등 5학년이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하며 봉투를 주었다. 신이 난 막내는 할아버지! 내년에도 세배드리면 또 세뱃돈 주시는 거지요? 다짐을 받는다. 절값 받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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