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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혼(魂)

admin 기자 입력 2022.02.06 23:23 수정 2022.02.06 11:23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우리 동네 어귀에 수령이 2, 3백여 년 된 아름드리 동구나무 한 그루가 있다.
누가 언제 심은 건지 알 수 없으나 키가 3, 4십m 둘레가 장정 두 팔로 네댓 될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기면서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리고 풍년을 기원한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제관들은 제를 올린 준비에 분주하다. 제관은 덕망이 높고 품행이 단정한 연세 많으신 어른들이다. 아버지는 매년 제사를 집전(執典)하시며, 제를 올리기 하루 전에 찬물로 목욕재계하시고 예와 정성을 다 하신다.

6.25 전쟁으로 나무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포탄에 팔과 가슴이며 어느 한 곳도 성한 데가 없다.

쭉 뻗은 팔이 반쯤 잘려 나갔다.
그 자리에는 아직도 피 맺힌 눈물이 글썽인다. 뻥 뚫린 나무 한가운데는 화약 냄새가 묻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암흑의 시간이 지나가고 평온한 세상이 찾아왔다. 철없는 조무래기들이 짓밟고 나무에 걸터앉아 괴롭혀도 싫어하지 않고 잎 피고 지고 하며 그늘을 만든다.

여름 해 질 녘 일상사로 큰 누나 친구 집에 찾아갔다. 친구 누나가 길 건너편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가 네 아버지가 심었다라고 한다.

뜻밖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었다.
질곡의 세월 속에서 수백 년 버텨온 동구나무가 세월에 못 이겨 쓰러졌다.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으로 섬겼기에 무서워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나무를 한 곳으로 모아 불태우고 타고 남은 재를 그 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고 난 뒤 한두 달 되었을까? 네 아버지가 일꾼을 데리고 4, 5십 리 되는 깊은 산골에 가서 10여 년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캐와서 재를 묻은 자리에 심었다. 그해는 하늘도 무심했다.

나무가 하늘을 찌르며 무럭무럭 자랄 때 누군가 나무 옆에서 쓰레기를 태우다 불이 나무에 옮겨붙었다. 불에 타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하면서 애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도 끝나기 전에 달려가 보았다. 불이 탄 나무는 삶을 포기한 채 말라비틀어진 여린 가지들을 부둥켜안고 멍하니 서 있다. 아버지의 ‘혼’이 담긴 나무다.

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죽어가는 나무를 붙들고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끝내 울음이 터졌다. 상처 입고 고통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혼이 하루빨리 쾌유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자양분 주고 비옥한 땅을 만들어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고 싶었다.

마침 군위에서 소보 가는 군도(郡道)를 확장 포장했다. 공사 현장을 찾아가서 현장 소장님한테 이야기를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소장님은 이야기를 들으시고 흔쾌히 들어주셨다.
트럭 서너 대가 흙을 싣고 동구나무 있는 곳에 들어부었다. 순식간에 흙은 거대한 흙무더기로 변했다.

흙을 고르고 가운데 나무를 심었다. 갓 둘레는 잔디를 입히고 위에는 꽃을 심어 보기가 좋았다. 그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땅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어린나무 잎은 타들어 갔다.
이웃집 수돗물로 위기를 면했다. 나무는 하루 다르게 자랐다. 어느덧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차양이 되었다.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여름 더위를 식혀 주는 거는 부채와 나무 그늘뿐이었다. 사람들이 나무 그늘을 찾느라 잔디를 밟아 길이 반질반질했다.

잔디는 하얀 속 살을 들어내며 소가 풀을 뜯어 먹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그냥 둘 수 없어 옹벽치고 그 위에 시멘트로 콘크리트 바닥을 했다.

식수 날짜와 아버지 존함 그리고 3형제 이름을 돌판에 새겨 정면에 붙여 놓았다. 몇 년이 지난 뒤 아버지 시대를 생각하며 동장한테 이야기했다.

제수(祭需)는 내가 준비할 터니 일 년에 한 번씩 동네의 안녕과 부강을 위해 제를 올리면 어떨까 했다.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옛날과 같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정리했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사람도 변했다.
부채 들고 그늘을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어느새 선풍기, 에어컨 등 가전제품이 쏟아지면서 마음이 변했다.

인정도 메말라 옛날 같지 않았다.
자기 집에 낙엽 하나 떨어져도 나무 옮기라고 성화를 부리며 난리 궂을 친다.
무더운 여름이면 피할 곳 없어 나무 그늘을 찾아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이제 와서 언제 그랬던가 모르는 척하며 사는 세상을 보면서 삶이 서글퍼진다.

세상이 변했다 하여도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꼴이 되었다.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의 혼이 담긴 나무를 옮기기로 생각했다.
2021.11.1. 나무 앞에 꿇어앉아 아버지께 고하였다. 아버지의 거룩한 혼을 길이 남기기 위하여 삼국유사 테마파크에 모시려고 합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게 한 불효자 엎디어 비옵니다.
부디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아버지! 테마파크는 아버지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입니다.

구경도 많이 하시고 새로운 세상이 무슨 말을 해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화도 내지 마십시오. 언짢아하지도 마십시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계십시오. 낯선 곳이지만 거기도 아버지 고향 군위입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고향처럼 따뜻하고 포근해질 겁니다. 먼 데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뵐 겁니다.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따뜻이 맞아 주십시오. 아버지의 혼이 스민 나무가 군위를 지켜주는 보호수로 길이 영생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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