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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알면서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admin 기자 입력 2022.03.21 10:04 수정 2022.03.21 10:0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게다. ‘척’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쓸데없는 이야기에 그 자리마저 위태롭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하여도 티끌보다 작은 지식 하나 가지고 아는 척 거들먹거리며 너스레 떠는 꼴은 두 눈 뜨고 참아 볼 수 없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늘 그랬다.

어느 것이 흰 까마귀고 어느 것이 검은 까마귀인지 진풍경이 벌어진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면 될 걸 그까짓 지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남의 눈을 속여가면서 목을 매는지 알 수 없다. 하기야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욕망이라 하지만, 꾸밈없는 참모습을 보여주며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모습일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는 학교, 은행, 수의 업 등 서로가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졌다.

6.25 전쟁 후 경제가 어려울 때였다. 서울 경기도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젖소를 두세 마리 먹이면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고 한다. 몇몇 친구들은 그곳에서 개원하였다. 나는 고향에서 개원하였다.

고향에는 한우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젖소보다 한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나는 한우를 주로 진료하게 되었고 친구들은 젖소를 진료하게 되었다.

소에 발생하는 질병은 대부분 거의 비슷하지만, 한우와 젖소에 빈발하는 질병이 조금씩 달랐다. 젖소 경우에는 유방염 등이 많고 한우 경우에는 급성 고창증 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방이나 진료하는 과정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 오후, 한 젖소 농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구불구불 산길 따라 쉼 없이 달렸다. 마구간에 들어가서 소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유방에 문제가 있는 거 같아 책장을 넘기며 며칠간 치료를 했다.

그럼에도 뜻대로 치유가 되질 않아 신경이 쓰였다. 유방염에 대하여 잘 아는 친구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마침, 경기도에서 개원하던 친구가 대구에 내려와 개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나마 정신적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만만 대군을 만나는 것보다 더 반가웠다.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마음이 진정되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보다 속을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오랜 고민 끝에 힘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유롭게 인사할 사이도 없이 소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유방염인 것 같다며 수술했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다. 이야기를 빨리 끝내주면 좋겠는데 애가 탄다. 조급증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시간이 언제쯤 나는지 물었다. 전화 주면 언제든지 가겠다”라고 한다. 유방염 수술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친구는 그 이튿날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반갑고 마음이 든든했다. 두 사람은 마구간에 들어갔다. 친구는 환부 주위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은근히 걱정되어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입맛만 쭉쭉 다신다. 혹시 잘 못 봤을까 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한번 살펴봐 달라고 했다.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세상에 뜻대로 되는 게 없다지만, 이것만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뜻밖의 표정에 너무나 황당하였다. 아쉬움과 서운함이 내 속을 파고든다.

그가 떠난 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지고 고민이 깊었다. 며칠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생각할수록 쓸데없이 전화를 걸어 왜 이렇게 마음을 아파하는지? 혼자 수술이라도 한번 해 볼 걸 하는 마음이 용솟음친다.

친구는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와서 보니 의외였다? 이해는 충분히 되나 그럼에도 사람의 욕심은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이 잘 되어 빨리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은 잊을 수 없었다.

진작 잘 못 한다고 이야기를 해 줬으면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걸,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후회가 내 가슴을 마구 짓밟는다.

소는 탈진 상태로 되새김질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다. 가슴이 쓰라리고 미어진다. 나의 부족함에 어이가 없어 죄책감마저 든다.
인제 와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백약이 무효라도 끊임없이 매달렸다. 퉁퉁 부었던 부위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다.

불안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난날 서로가 힘들어했던 그 순간은 너무나 아팠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지난 쓰라린 경험을 딛고 틈틈이 배우고 익히며 노하우와 지식을 쌓아 왔다.

불행했던 지난 악몽을 깨끗이 잊고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아 너무나 행복했다.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지식이라지만 나에게는 진주와 같은 귀중한 보석이었다.

이를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다행히 아니었다. 생각할 수 잘했다고 생각한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마음이 훨씬 더 편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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