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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천년의 왕궁, 청와대 정치 막이 내려지나

admin 기자 입력 2022.04.04 09:47 수정 2022.04.04 09:47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정계 입문 1년만에 기라성 같은 프로 정치인들을 어퍼컷 한 두방으로 쓰러뜨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슈퍼 히어로’다.
강골 검사 였던 윤석열의 쾌도난마는 한 검객의 멋진 ‘정치 드라마’ 같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
하늘이 점지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모세의 기적을 연상케 한다.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민심이 천심으로 발로해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한 무능한 좌파 5년을 바로 잡고, 윤석열 당선인은 국민의 부름을 받아 선택 받은 대통령으로써 오로지 헌법에 따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어 천만 다행이다.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윤 당선인 선거 공약대로 청와대는 절대 들어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모든 뉴스의 불랙홀이 되고 있다.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는 단연코 들어가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 이전은 천도(遷都)에 가까운 중차대한 일이다. 현 여당 일각에선 윤 당선인이 풍수나 무속 때문에 집무실을 이전하려는 거 아니냐 며 풍수설로 호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건국 도읍지 선정과 풍수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풍수설이란 무엇인가? 자연계란 일견 무질서해 보이고 불가사의한 세계처럼 보인다. 천변만화, 천태만상이 얼키고 설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 잘 날 없고 비도 많지 않는 황무지에 집을 짓고 산다면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음지에서는 생명력이 넘치는 꽃이 피어날 수도 없다.

땅의 형세를 보아 길지 명당을 가려내어 재앙을 피하고 자연의 복을 받아보자고 해서 생긴 것이 풍수지리설이다. 풍수설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발생하여 왕실과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였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도선(道詵)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될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이란 예언을 도선비기에 기록으로 남겼다.
또 신라 말 학자 최치원은 그의 문집 속에 “계림(鷄林)은 황엽(簧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고 했다.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이란 예언을 남겨 유명하다.
도선의 예언대로 조선이 건국됐고, 최치원의 예언대로 고려가 세워진 건 사실이다.

지금의 청와대 터가 역사에 오르내린 기록은 천여 년에 가깝다. 고려 11대 숙종 5년인 1101년 남경에 궁궐을 지어 사용했으나 개경에서 천도는 하지 못했다. 그만큼 경복궁 뒤 청와대 역사는 길고 오래되었다. 600여 년 전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과 무학대사도 풍수에 능했다.

태조 이성계는 도선국사의 비기를 들어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하여금 지세를 살피게 했고, 북악산 아래에 궁궐을 짓고 1394년에 천도했다.

이후 500년 동안 조선은 태조에서 27대 순종왕에 이르는 조선의 왕궁으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중심에 경복궁 후원에 청와대가 있었다.

그런 경복궁에 어떤 오욕의 부침이 있었을까? 1398년 태조 4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이가 이복 동생인 방석 세자와 그의 형 방번, 정도전을 죽여 경복궁을 피로 얼룩지게 했다.

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도망가고, 왕에 분노한 백성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후 무려 270년 동안 경복궁 터가 잡초에 묻히기도 했다. 그후 홍성대원군이 1867년 경복궁을 중창했으나 1895년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된 이후 경복궁을 애써 쓰지 않아 한때 버려진 땅이 되었다.

그런 땅 위에 일제가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어 사용했던 굴욕과 치욕이 쌓인 경복궁이다.
그러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풍수사들이 청와대 터가 흉하다고 한다.

왕조시대 구중궁궐만큼이나 구중심처가 된 청와대 존속에 대한 문제 의식도 역대 정권에서 제기되어 왔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권위를 부각하는 구조여서 그 안에서 마주치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혹은 비리가 터질 때마다 청와대 터가 나빠서 대통령 말로가 불행해진다는 풍수설이 나돌긴 했다.

풍수학계의 권위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청와대 터의 풍수의 상징성은 그곳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거처”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대통령들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고 살다가 뒤끝이 안 좋았다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도 1404년 조순, 하륜 등 대신들과 풍수사 이양달을 불러 경복궁 터를 잘못 잡았음을 질책한다(태종실록). 이곳이 도읍지가 될 수 없는 까닭으로 온통 바위산에 명당수가 없는 것을 들었다.

청와대를 떠나려고 했던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있다. 박정희와 노무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발표했다. 옮기고자 한 까닭은 인구집중, 국토의 불균형 발전 해소였지만, 북한의 사정거리 안에 서울이 들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79년 오현철 단장이 지휘하는 건설기획단을 ‘백지계획’이란 암호아래 발족하여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실행 단계에서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의 서거로 이전계획이 무산되었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가 그 예정지였다.

또 2002년 당시 노무현 대선 후보도 충청권에 ‘신행정수도건설’ 공약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뒤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이전은 좌절되었으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안으로 축소 변경된 게 지금의 세종시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잡은 공주 장기면과 현재의 세종시가 인접하면서 금강변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선현들은 풍수를 불가신불가폐(不可信不可廢)라 하였다. 풍수를 믿을 수도 없지만 없앨 수도 없다는 뜻이다.

1000년 가까이 궁궐 역할을 하면서 나라에 기여한 역사적 공로는 간데 없고 불행한 과거사만 들춰내 타박만하니 세상 속 야박함을 탓해야 할 지 씁쓸하다.

600년 전 조선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하고 한양도성에 경복궁을 설계했던 역성혁명자 삼봉 정도전도 요즘 마음이 영 편치 않을 듯하다.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는 들어기지 않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현 청와대가 딴청을 부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안보 공백을 이유로 대통령집무실 이전을 반대한 데 대해 전직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 대장을 포함한 예비역 장성 1000여 명이 윤 당선인이 추진하는 집무실 이전에 따른 안보 공백은 없다며 윤 당선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냈다.

대선은 끝났다. 이젠 누구도 국민이란 호랑이 등에 탄 윤 당선인이 지향하는 길을 막을 권리는 없다. 0.73%의 대선 승리 수치는 신의 한 수다.

패거리정치로 패배한 문 정권 5년을 반문교사로 삼아 윤 당선인은 국민이 두드리는 신문고에 귀를 기우리는 국민을 위한 정치, 초심을 잃지 말라는 국민의 당부가 담긴 경고와 대선 수치의 깊은 의미도 항시 새겨야 한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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