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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불역쾌재(不亦快哉)

admin 기자 입력 2022.04.19 22:03 수정 2022.04.19 10:03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이 또한 쾌하지 않으리오.
간밤에 돼지가 새끼 10마리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범상치 않은 꿈인 거 같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다.

꿈은 허황한 것이라 믿지 않지만, 성공은 99.9가 노력이고 0.1이란 운(運)이 따라야 한다는 걸 믿는다. 내 모든 희망을 0.1에 걸고 망망대해 노 저어 간다.

동물 병원 개원하는 날이다.
이른 아침 친인척들이 찾아와 축하해 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마시면서 재밌는 이야기에 시간 간 줄 모른다.

사람들이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난다. 배웅하면서 서운한 게 있을까 봐 신경이 쓰인다.
텅 빈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명상에 잠긴다. 청운의 꿈을 꾸며 새로운 마음 가짐을 다짐한다. 뼈가 부스러지고 가루가 되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자수성가란 이름표를 달 것이다.

비록 지금은 구멍가게 같은 집에 전세로 들어 살지만, 언젠가 빌딩 같은 집을 지어 살 것이다.

아들딸 낳아 행복한 가정 이루어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 친구들과 같이 영천 은해사에 놀러 갔다. 친구들 오토바이는 90cc에 새것과 같았다. 내 것은 50cc에 낡은 거라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우의를 챙겨 입고 출발했다.

오토바이가 긴 행렬을 지어 빗속을 뚫고 달린다. 기분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거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신령 갑티재를 막 올라가는데 오토바이 앞 쇼바(완충기) 양쪽이 갑자기 뚝 부려져 버렸다. 까딱 잘못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다.

바퀴를 빼고 몸체는 125cc 타고 가는 친구 오토바이에 싣고 작은 부품들은 또 다른 친구 오토바이에 싣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가 처지고 힘이 쑥 빠졌다. 마음을 추스르며 고까짓 하고 잊어버렸다.

설중매가 눈 속에서 빨간 얼굴을 내밀 무렵 친인척들의 축복을 받으며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며 친구들이 놀렸다. 이듬해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접어드는 어느 날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뒷짐 지고 좁은 골목을 서성거리고 있는 거를 본 친구가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하며 묻는다.
어깨를 으쓱이며 있고 말고다. 간밤에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이제 나보고 놀리지 말게 하며 박장대소했다.

만장같이 넓던 방이 식구 하나 늘면서 금세 비좁아진 것 같았다. 태어나자마자 연탄가스로 죽을 뻔했던 녀석이 살아 기어 다니는 거를 보고 마음이 울컥했다.

아찔했던 그 순간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신은 시기와 질투로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행복 꽃이 만개한 온실 방에 뜻하지 않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집주인이 사업을 한다며 방을 빼 달라고 한다. 그것도 보름을 앞두고 말이다. 기가 차고 같잖기도 했다. 이 많은 짐을 어떻게 보름 만에 다 뺄 수 있단 말인가? 순진해 빠진 나는 골도 부리지 않고 끙끙대며 속앓이하고 있었다.

세상 모르고 살아온 나는 이 집을 떠나면 죽는 줄 알고 허둥대며 이웃집에 있는 허름한 집을 수리했다. 수리를 다 하고 보니 조제실 처치실 공간이 좁아 이사할 수 없었다.
이 집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는 집을 샀다. 그 집에 모든 짐을 옮겨 놓고 가게 얻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

누구의 소개로 도로변에 있는 집을 팔려고 내놨다 하기에 가 보았다. 매매 가격보다 두 배를 더 달라고 했다. 오갈데 없어 방황하던 나는 흥정할 사이 없이 어떻게 하든 사야만 했다. 앞뒤도 생각할 겨를 없이 은행에 대출받아 덥석 샀다. 주위에서 집값을 올렸다면 원성 소리가 자자했다.

밤이 이슥토록 잠이 오지 않아 잠을 뒤척였다. 이른 새벽에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통시 집도 제집이 최고라 대궐 같았다. 기쁨, 서러움, 외로움에 끓어오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애들이 학교에 다니고 쓰임새가 점점 많아졌다. 겨우 빚을 다 갚았는데 또 빚을 걸머져야 할 형편이었다. 수입으로는 턱 부족했다.

당시 고향 군위는 경북도 내에서 돼지 두수가 제일 많았다. 돼지 먹이는 업자들은 하나같이 잘살았다.

수입이 괜찮은 것 같아 돼지를 먹여 보고 싶었다. 500여 평 남짓한 밭 귀퉁이에 돼지우리가 있는 밭을 샀다. 남들이 하는 거를 보니 쉬운 거 같았는데 예사 아니었다.
사룟값이랑 돼지우리 청소 등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돼지 밥주려 다니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돼지 밥 주고 진료하느라 눈코 뜰 사이도 없었다.

돼지 수가 점점 늘어나 300여 두 되었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이글 어지고 예전만 같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 파리가 들끓는다며 한마디씩 한다. 파리약 사 주고 일 년에 한 번씩 인사하면서 근근이 먹였다. 그러던 사이 빚도 갚고 생활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0.1밖에 안 되는 운(運)에 내 모든 희망을 걸고 망망대해를 노 저으며 출발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미래는 보이지 않고 얽히고설킨 추억들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듯 운(運)은 나를 저버리지 않고 따라 준다.

전셋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을 때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허리띠 졸라매고 통시 같은 집을 샀을 때 기쁨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아들딸 낳을 때 기쁨과 흥분에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자수성가란 이름표를 달고 싶었던 젊음의 야망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다. 내가 소망한 모든 꿈들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 기쁨, 이 또한 쾌하지 않으리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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