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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새빨간 거짓말

admin 기자 입력 2022.06.03 11:13 수정 2022.06.03 11:13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선거철만 되면 홍수처럼 쏟아진다.
사람들은 솔깃한 말에 땀을 뻘뻘 흘리며 쪼그리고 앉아 선창자가 내지른 구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손뼉을 친다.

후보자 기호가 몇 번입니까? 선창자가 묻는다. 일제히 몇 번입니다.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후보자들의 얼굴은 철판보다 더 두껍다. 사람이 지나가면 민망할 정도로 허리를 굽힌다. 자동차에 솥뚜껑만 한 스피커를 달아 ‘내가 적임자다.’ ‘무엇을 하겠다.’고 귀청이 따갑도록 목청을 높여 종일 거리를 누빈다. 공약만 믿고 뽑아 주었더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4년 동안 법안 발의해서 통과시킨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어 서다.

그래 놔 놓고 4년 뒤에 또 출마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만나면 가뭄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기며 장사진을 이룬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본다. 6·25 전쟁으로 굶주리고 헐벗고 먹을거리가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시피 했다.

어려운 가운데도 4년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괜히 마음이 들뜨고 설레었다.

어느 후보자가 당선되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속심은 유세장에 가면 먹을거리가 있다는 것에 있다.

거기에는 큰 가마솥에 쇠고깃국 끓어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고무신 등을 주며 국밥에 탁주 한 사발씩 주고 했다. 사람들이 유세장에 벌떼처럼 몰려든다. 허기진 배에 마음껏 드신 사람들은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지시고 했다.

비참하고 참담한 광경을 보면서 어린 가슴에 새겨진 시커먼 멍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의 몸도 마음도 생각 모두 바꿨다. 술에 취해 땅바닥에 드러누웠던 사람들은 꽃길 따라 먼 곳을 가셨다. 후손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펼친다.

어깨에 큼직한 띠를 두르고 네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연시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한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텐데, 그렇다고 특정인만 하는 거 또한 아니지만, 정치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서 두렵고 걱정이 앞선다.

어느 날 지인이 뜬금없이 어깨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에서 얼굴을 들이 내미는 거를 보고 놀랐다. 생각을 접으라고 극구 만류해도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거짓말은 할수록 는다’는 말 있듯 거짓말보다 잘 느는 거 없었다. 성격이 대쪽 같았던 지인이 어느새 몰라보게 변해 버렸다.

거짓말할 줄 모르던 사람이 거짓말을 밥 먹는 듯이 하는 거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을 유혹하는 거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사람들은 옛정을 버리지 못하고 지인이 말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따른다.
지인은 놀라면서 여태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부와 명예와 권력 중 제일이 권력이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양같이 순한 사람이 갑자기 무서운 표범으로 변해 버렸다.

그의 눈매를 보고 무섭고 겁이 덜컥 난다. 하는 수 없어 내 일처럼 알뜰살뜰 보살펴 주었건만, 월계관을 쓰고는 허리 굽혀 절했던 절값 내놓으라며 야단법석이다. 낯 뜨거운 풍경을 보면서 후안무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리석게도 약속한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농담도 못 하겠네!’ 능청 부리며 하는 말이 전부였다. 할 수 없는 새빨간 거짓말 하며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운 좋게 살아온 것만도 다행이다. 씁쓸한 마음 둘 곳 없어 방황한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농담도 못 하겠네’ 하는 말이 나를 윽박지른다. 그런데도 그 말이 옳다고 기죽여 사는 사람들, 하고 싶은 말 다하지 못하고 고개 숙여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자고 나면 또 그 사람 뒤를 따라다닌다. 아무리 돌고 도는 세상이라 하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거짓말에는 3대 새빨간 거짓말이 있다. 하나는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
또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 봤다는 말. 다른 하나는 돈을 빌려 가면서 조금 있다 줄게 하는 말이다. 이 중 제일 큰 새빨간 거짓말은 ‘조금 있다 줄게’ 하는 말이다.
어느 날 이른 새벽 지인이 헐레벌떡 찾아와서 은행의 문이 닫혀있어 돈을 찾을 수 없다며 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다. 거절할 수 없어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 빌려주었다.
숨이 곧 넘어갈 듯 빌려 가서는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독촉하면 내일 줄게 하며 하루 이틀 넘기는 것은 예사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는 당황했다. 차라리 돈이 없어서 못 주겠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속이나 시원했을 것이다. 돈을 빌려주고 달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는 지치고 민망해서 더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팔자걸음으로 활개 치며 거리를 활보한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다리를 오므려 자고 빌려 간 사람은 펴고 자는 꼴이 되었다. 답답함을 못 이겨 가끔 생각에 젖는다.
돈을 빌려준 내 잘못도 있지만,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인정에 못 이겨 빌려준 것이 내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나와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늦게나마 알게 되어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순간의 아픈 감정은 아직도 마음에 응어리져 있다. 새빨간 거짓말을 밥 먹는 듯하던 그 사람,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길 소망한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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