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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똥장군

admin 기자 입력 2022.06.20 00:38 수정 2022.06.20 12:38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날씨가 심상치 않다. 아침부터 하얀 눈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적다.

소문난 대로 눈은 부지런하다고 한다. 그래서 한 곳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곱게 단장해주느라 정신이 없다.

오랜만에 같이 만나 할 이야깃거리가 많은데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흔적만 남겨놓고 황급히 떠나버린다.

아버지께서는 농촌에 사시면서도 삶을 즐겁게 사셨다. 당시에는 비료가 귀해 똥과 오줌을 풀과 흙에 골고루 섞어 두엄을 만들어 농사를 짓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엄동설한에도 이른 새벽이면 지게에 똥장군을 지고 흥얼거리시며 들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셨다.

학교 변소를 말끔히 청소해서 똥장군에 담아 보리 싹이 꽁꽁 얼어붙은 땅거죽을 뚫고 올라온 논바닥에 똥물을 골 따라 한 골씩 붓고 했다.

여느 날 동이 트려면 한참 멀었는데 아버지께서 평소와 같이 들로 나가셨다. 밤사이 서리가 하얗게 내려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좁은 논둑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는데 그만 발이 미끄러져 똥장군을 걸머진 채로 넘어졌다.

똥물을 뒤덮어 쓴 솜바지에 구린내가 등천했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살갗에 묻은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식구들은 코를 털어 막아 아침을 먹으면서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철없는 우리들은 호들갑 떨면서 밥을 먹는 둥 만 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셨다.

아버지는 봄이 오면 주름살 낀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먼 산 양지바른 곳에 수줍어 고개 숙인 할미꽃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새벽에 나가신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할미꽃을 보면서 날 보려 여기 오시느라 고생 많았지? 눈인사하며 어루만져 주신다. 할미꽃은 숨겨온 붉은 자주색 주머니를 내밀며 답례한다.

아버지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 지으시며 주머니를 받아 들고 집으로 데리고 온다. 찌든 삶 속에서도 우리는 즐겁게 사시는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살아간다.

햇살 가득한 어느 봄날, 밭에 김을 매려 아버지 따라간다. 아버지께서 먼 산에 울긋불긋 피어 있는 꽃을 보시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구나! 한 폭의 그림과 같구나 하신다.

아버지는 농사만 짓고 사시는 뿔뚝 농사꾼으로 알고 있었는데 저런 말씀을 어떻게 하실까? 어리둥절해하면서 아버지 얼굴을 힐끔 쳐다본다.

꽃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풍성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 겉만 보고 평할 수 없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꽃을 다 좋아하신다. 그중 백일홍을 더욱더 좋아하신다. 우리 집 뒤에 배롱나무를 심어놓고 매일같이 손질하시는 거를 보았다.

그래서 먼 훗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묘소에 배롱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서 진달래꽃 한 아름 꺾어 들고 오신다. 커다란 버지기에 꽂아 놓으시고 엷은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신다. “이 꽃 참 아름답지?” 하시며 흩어진 꽃송이를 한곳으로 모으신다. “산에 가면 천지삐까리인데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꺾어 왔습니까?” 철딱서니 없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그대로 지껄여 댄다.

아버지께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철 따라 핀 꽃을 한 아름씩 꺾어 들고 와서 유리병에 꽂아 방구석에 놓으신다.

아버지는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한 향기로 우리를 키워주셨다.
아버지께서는 시간이 나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옛날 선비 방에는 난(蘭)이 있었다며 개나리꽃을 병에 꽂아 내 책상 위에 놓아주셨다.

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아버지셨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지내오면서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을 너무나 많이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만 바라보시고 사셨던 아버지의 연세가 내일 모래면 90세셨다.
이를 넘기지 못하고 꽃길 따라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일하시던 양지바른 밭에 모셨다.

꽃동산을 만들어 아버지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었다. 묘 둘레에 구상 목을 심고, 뒤에는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시던 영산홍, 앞에는 개나리를 심었다. 그리고 옆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봄이 문을 활짝 연다. 아버지 묘 주위에는 목련, 개나리, 해당화, 백일홍 등이 겨우 내내 가꾼 얼굴을 살포시 드러낸다. 봄 향기가 바람 타고 온 세상을 퍼 나른다. 인기척 없는 깊은 산골에도 번잡한 시내에도 가득하다.

벌과 나비들이 제집처럼 꽃송이에 들어앉아 날갯짓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닥거리고 있다. 앙상하던 나뭇가지에도 잎 피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보리도 기지개 켜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똥장군을 지고 보리밭에 골 따라 한 골 한 골씩 똥물을 부어주었든 보리가 쑥쑥 자라 익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기뻐하시며 찌든 얼굴에 만면의 웃음꽃이 늘 가득하다.

보리 익는 냄새가 가득한 들판을 지날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똥장군을 지고 서리가 내린 좁은 논둑길을 걸어가다 똥장군을 걸머진 채로 넘어지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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