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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비운의 임금 단종과 충의공 엄흥도

admin 기자 입력 2022.11.03 10:30 수정 2022.11.03 10:30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조선 6대 임금 단종은 비운의 왕이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홍위(훗날 단종)를 낳을 때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앞두고 시부(媤父)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세종은 명석한 장손자 홍위를 무척 아꼈다. 홍위가 8살 되던 세종30년, 1448년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그후 세종이 승하(昇遐)하고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홍위를 세자로 책봉한다.

왕위에 오른 문종이 원체 병약하여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남기고 승하했다.

이때 단종 나이가 12살이었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너무 어려 모든 국사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집행하다시피 했으며 단종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 왕족들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수양대군 외 16명이나 되는 왕숙(王淑)들이 왕권을 넘보기 시작한다. 이런 세력 다툼에 단종은 권력 투쟁의 소용들이 속에서 비극적 운명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결국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어린 왕 단종을 도운다는 명목으로 권력 찬탈에 뛰어들어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실세로 등장한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7년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 서강 청령포로 유배 보냈다. 이때 친동생인 금성대군을 비롯해서 종친과 많은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 보냈다.

그런 후에 1456년 6월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집현전 출신의 학사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흥부 등 사육신마저 처형 제거했다.

권력을 거머쥔 수양대군은 급기야 의금부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시켜 17세의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음에 이르도록 하여 조선 전기의 최대 비극인 ‘계유정난’이라는 정치 쿠데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인조 때 문신 나만갑은 ‘병자록(丙子錄)’에서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왕방연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들어가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왕방연이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하나가 항상 단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쳐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고 목격담처럼 세세히 기록했다.

21세기인 지금, 북한 김정은이가 이복형 김정남을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륨푸르 국제공항에서 백주 대낮에 암살하도록 교사했다. 이후 김정남의 유족들 부인과 아들 김한솔과 딸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어딘가로 행방을 감췄다. 김정은에게는 이복형 김정남이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또 김정은은 고모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도 무참하게 숙청했다.
김정남을 뒤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한 사람이 장성택으로 생각하고 고사포로 쏴 죽였다고 한다. 어느 시대 건 권력자들은 피로 얼룩진 추악한 숙청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단종이 죽은 후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강가에 방치되었다. 당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할 경우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위 의흥면 금양리 봉강제(鳳岡齊)에서 간행한 ‘충의공실기(忠毅公實記)’에 의하면 ‘단종께서 승하하였을 때 고을의 수령이하 모든 이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접근을 못했다.

공(公)이 홀로 곡을 하고 부모를 위해 구비해 두었던 관을 가지고가서 아들 광순과 더불어 옥체를 염장하여 풍설이 치는 밤에 고을의 북쪽 동을지(冬乙旨)산에 안장하였는데, 그곳은 충의공 엄흥도(嚴興道)의 선영(先塋)내에 있는 지금의 장능(莊陵)이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입어도 나는 마음으로 달리 받겠다”라고 말했다.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된 것은 1698년으로 숙종 24년 11월 때의 일이고 묘호(廟號)를 단종, 능호를 마침내 장능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종의 장사를 치른 후 엄흥도는 벼슬을 내놓고 아들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첫째 아들 호현은 문경으로, 둘째 아들 광순(光舜)과 본인은 산수를 방랑하며 영남지방을 헤매다가 은거(隱居)하기에 적합한 산간벽지 옛 의흥현 화본 조림산에서 일흔 한살까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셋째 아들 성현은 함경도 안변에서 숨어 살게 하였다. 충의공 엄흥도의 묘소가 영월, 청주, 의흥 등 3곳이나 있다고 해서 진묘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그러나 의흥면 금양리에 집성촌으로 거주하는 엄씨들의 ‘영월엄씨파보’와 ‘충의공실기’ 등으로 보아 엄흥도가 의흥 은거의 문헌적 근거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19대 숙종이 즉위하여 엄흥도를 공조좌랑에, 시호를 충의공(忠毅公)으로 하니 영월엄씨 문중이 의흥에 들어가서 대대로 살게 된 근거가 되었다.

충의공 엄흥도는 21대 영조 때 다시 추증(追贈)되어 공조판서가 된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에 조선왕조실록에 사실(史實)로 수록된 충의공 엄흥도의 발자취가 너무 역력하다.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어명에도, 일편단심 단종을 향한 충절이 얼마나 고귀한가? 그런고로 역사적 사실을 잘 다듬고 보존하여 충신의 귀감으로서 교육적 관광순례지로 선정하여 의흥면 금양리 영월엄씨 문중에서도 적극 협력하고 군위군이 나서서 충신 엄흥도의 얼을 닦고 새기어 후손들에게 널리 알렸으면 하는 출향인의 제언을 관계기관에서 한번 숙고해 줬으면 한다.

황성창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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