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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 홍재하 선생 장졸당 중건 준공식

admin 기자 입력 2022.11.03 20:59 수정 2022.11.03 08:59

문집국연본 편찬까지 완수

ⓒ N군위신문

지난 10월 16일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황청리) 1030번지에서 고아한 선비의 기개로 올곧은 삶을 살다 간 우석(愚石) 홍재하 선생이 생전에 경영했던 장졸당(藏拙堂) 중건 준공식이 성대히 거행됐다.

중건 준공식에는 홍재하 선생의 손자인 홍원발 대표(㈜경동산기)를 비롯해 김진열 군위군수, 한명동 한스 회장, 홍우흠 영남대 명예교수, 홍구헌 부림홍씨 대종손, 홍원식 박사(계명대 철학과 교수) 등 내빈과 문중 관계자 등이 참석해, 뜻깊은 행사를 축하했다.

준공식은 홍원진 씨가 장졸당 중건 경과보고를 설명하고, 홍원발 대표가 가족대표로 인사말을 전했다. 또 김진열 군수 등이 축사를 했고 홍원식 박사가 홍재하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설명했다.

장졸((藏拙)이란, 자신의 옹졸하고 열등함을 덮고 감추어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함이란 뜻인데, 스스로 겸손함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홍재하 선생은 민족의 해방의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나갈 공간의 이름을 장졸당(藏拙堂)이라고 지었다.
ⓒ N군위신문

중건된 장졸당은 5칸 겹집 와옥(瓦屋)으로 웅장하면서도 단아하게 지어졌고, 삼문과 협문 및 관리사도 장졸당에 걸맞는 규모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날 홍원발 대표는 인사말에서 “오늘 장졸당이 다시 세워진 이곳은 조부께서 태어나신 곳”이라며 “이제 제가 선고의 뜻을 이어받아 장졸당 중건의 꿈을 이루고 문집 국역본 편찬까지 완수하게 되어 감격을 주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장졸당 중건과 문집 국역본 편찬 사업을 마쳤으니, 이 귀한 공간을 값지게 활용하고 조부의 학덕을 널리 현창하는 일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안 후손들도 나의 뜻을 깊이 새겨 이어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진열 군수는 “오늘 우석 홍재하 선생의 장졸당을 다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며 “장졸당 중건은 단지 외형적인 옛 모습을 되찾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고장의 청신고매한 애국애족사상을 가꾸고 보호하는 정신을 길러나가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축사했다.

홍우흠 영남대 명예교수는 “이 장졸당은 우석 선생의 학문과 덕망을 계승 발전시키는 학당임과 동시에 충효를 전가(傳家)의 교훈으로 삼아온 부림홍문의 영광이며, 국가 사회의 혼란을 정화시키는 데 필요한 일종의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 N군위신문

홍구헌 부림홍씨 대종손은 축사에서 “오늘 이 자리는 역사는 장졸당 후손들의 자리이자 부림홍씨 문중의 길일(吉日)이기도 하다. 문중에서 양산서원을 복원한 후 맨 먼저 장졸당을 중건했으므로 앞으로 더 많은 재실이 중건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행사에 참석한 한명동 한스 회장도 축하의 말을 전했다.
우석(愚石) 홍재하(洪載夏) 선생은 1882년 10월28일(음력) 부계 청동리(淸洞里)에서 본제(本第)에서 출생했다. 본관(本貫)은 부림(缶林), 성(姓)은 홍(洪), 명(名)은 재하(載夏), 자(字)는 경우(敬禹), 호(號)는 우석(愚石)이다. 부(父)는 봉섭(鳳燮)이고, 모(母)는 경주(慶州) 최씨(崔氏) 명룡(命龍)의 딸이다.

부림 홍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 시중(侍中)을 지낸 란(鸞)이며 기세조(起世祖)는 좌(佐)로, 홍재하 선생은 부림 홍씨 24세이다. 고조(古祖)는 상문(象文), 증조(曾祖)는 우영(宇永), 조(祖)는 기석(期錫)이다.

홍재하 선생은 6~7세 계부(季父) 청재공(淸齋公)에서 가르침을 받다 이후 신리(莘里)의 족형(族兄) 오은공(五隱公) 아래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 약관 때부터 종형(從兄) 묵계(黙溪)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홍재하 선생은 지곡(枝谷)의 족숙(族叔) 율산공(栗山公)의 문하(門下)에도 출입했으며, 율산공이 세상을 뜬 후 문집 간행을 주도했다. 율산공의 문하생들이 조직한 회보계(會輔契) 계원으로 활동하며 <회보계서(會輔契序)>를 지었다.

홍재하 선생 13세 때 모친이 돌아가시고 29세 때 종형이자 스승인 묵계 재희(載熺)의 상을 당했다. 홍재하 선생은 묵계의 유고를 수습해 6권 3책으로 편집을 마쳤으나 문집을 간행하지는 못했다.

30세(1911년)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면우 선생은 조선말 대 성리학자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고제(高弟)이다.

36세(1917년) 안동 고산서원, 도산서원, 임천서원을 알묘(謁廟)했다. 돌아오는 길에 삼산(三山)에 들러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 1841~1924) 선생을 방문하여 상례 복제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서파 선생은 유치명(柳致明)의 고제이자 당시 안동지역을 대표하는 유현(儒賢)이다. 홍재하 선생은 당대 영남 일대의 명유제현들과 활발한 교유를 가졌다.

37세(1918년) 1월21일 고종(高宗)이 붕어했다. 홍재하 선생은 경찰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갖춰 대성통곡하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했다.

39세(1920년) 봄 제문을 지어 스승 면우 선생의 문상했고, 44세(1925년) 정월 면우 선생 문집 편찬을 위해 이동서당에서 열린 회합에 참석했다.

47세(1928년)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치렀다. 홍재하 선생은 특히 상장례(喪葬禮)에 밝아 법도를 잘 갖춰 상을 치렀다.

56세(1937년) 4월(음력) 20여 일간 동쪽 지방 유람을 다녀왔다. 유록은 남아있지 않고 <동유록서(東遊錄序)>만 남아 있다.

58세(1939년) 3월19일 친지, 도우(道友)들과 어울려 속리산 유람(23일 간의 여정)을 다녀왔다. <속리산유록(俗離山遊錄)>을 남기고 곳곳을 탐방하며 지은 시도 여러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렵 홍재하 선생의 아들 규호가 선생의 장수처(藏修處)로 살림집에 붙여 초가 몇 칸을 마련했다. 이에 홍재하 선생이 장졸당(藏拙堂)이라 이름 붙였다.
‘장졸’이란 의미는 <채근담(菜根譚)> 속 “장교어졸(藏巧於拙)”에 있다. 자신의 뛰어남을 어리석음 속에 숨긴다는 것이다.

홍재하 선생의 호 ‘우석(愚石)’이란 호도 비슷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선생은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세상을 만나지 못해서 그 뜻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되 모자라는 듯(拙) 어리석은(愚) 듯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홍재하 선생은 장졸당 벽에 ‘그릇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불위비(不爲非)’ 세 글자를 써 붙여 놓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홍재하 선생은 언젠가 조국과 민족의 해방이 다가올 그 날을 기다리며 조석으로 장졸당을 출입하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의를 다짐을 물론 자질손(子姪孫)이나 원근 문우(文友)들에게도 그 깊은 함의를 알렸다.

66세(1947년) 홍재하 선생의 부인인 전씨(全氏)가 세상을 떠났고 2년 뒤 8월 30일(음력) 홍재하 선생도 68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홍재하 선생은 부인과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선생의 아들 홍규호 씨가 1960년(사후 11년) 유문(遺文)을 모아 <우석문집(愚石文集)>(전 5권 2책)을 간행했다.

2022년(사후 73년) 10월16일 선생의 손자인 홍원발 대표가 장졸당을 중건하고 <우석문집> 국역본을 간행했다. 조수학 박사와 홍우흠 박사가 <장졸당중건기문(藏拙堂重建記文)>을 지었다. 또 조수학 박사가 문집 국역을 맡았으며, 홍원식 박사가 연보(年譜)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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