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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admin 기자 입력 2022.11.21 10:43 수정 2022.11.21 10:43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지난달 26일 부산문학인아카데미협회에서 문학기행으로 영천 일원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아침 8시 서면 영광도서 앞에서 출발하여 영천 은해사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임고서원을 답사하고, 조선시대 3대 시인의 한사람인 노계 박인로 문학관을 들러보는 일정이었다.

출발시간에 맞춰 온 회원들은 40명, 구본윤 사무국장과 집행부의 안내를 받으며 승차한 후 곧장 출발했다.

오래 참았던 문학기행을 가면서 차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단풍잎 하나, 노랗게 변해가는 풀잎 하나가 모두 아쉽고 아득했다. 가을의 한복판에서 그 풍경이 사라지질 않을 것 같았다. 가을빛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하얀 겨울이 무시로 찾아 올 것이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새로움이 탄생하는가. 수많은 잎이 피었다 지지만 그중 같은 잎은 하나도 없다.

이땅에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 죽어가지만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토록 무한한 세계의 다채로움이 때로는 잘 믿기지가 않는다.

차량이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행사를 준비한 임원들이 방문지별 시간표와 약간의 간식 및 음료수 등을 나눠주고 차달숙 회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회장은 답사할 유적지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첫 목적지를 향해 가는 차중에서 깜짝 기획한 삼행시 백일장과 시 낭송대회를 열겠다고 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짜놓은 노래자랑 대회를 끝으로 문학기행 스케줄을 마무리할 것이라며 각 대회 심사료나 입상자의 상금은 어렵게 마련한 달러화로 전달하겠다는 회장의 아이디어가 너무 신선해 회원들이 큰 박수로 화답했다.

인사말이 끝나자 마자 깜짝 대회의 첫 순서로 ‘박인로’를 시제로 삼행시 백일장 대회를 열었다. 삼행시를 심사하는 동안 병행해서 시 낭송도 사전에 선발된 희망자 10명이 금은상을 두고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그렇게 즐기는 사이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 은해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하차하여 주위를 살피니 넓은 광장에 설치된 분수대에서 치솟는 분수가 가을 하늘을 파랗게 밀어 올리 듯 시원스레 보였다. 주위 나무들은 어느새 잎사귀가 노랗게 물 든 걸 보아 세월의 시계추는 잠시도 쉬어가는 법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 내린 일행을 이헌희 문화관광해설사가 반가운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해설사는 영천시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인구는 10만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이며, 전국에서 년중 강우량이 가장 적은 탓으로 복숭아나 포도 등 과실 당도가 높다며 특산물 홍보도 잊지 않았다.

특히 영천에서 배출한 역사적 인물로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화학발명가 최무선 장군, 조선중기 가사문학의 대가 노계 박인로 등 셋 성현을 자랑할 때는 해설사의 눈빛에서 영천의 자긍심이 배어났다. 해설사의 입담이 너무 유창해 명함을 요구할 정도로 금새 친밀감이 들 정도였다.

해설사따라 일주문을 들어서니 나무아미타불 표지석이 보였고 금호정은 울창한 소나무들로 하늘을 가렸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섶에 ‘사랑나무’가 사랑스럽게 서 있다.

100여년생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얼마나 정이 들었길래 서로 껴안고 붙어 있는 모습이 연리지 중에 매우 희귀하게 보였다. 사랑나무를 지나 ‘보화루(寶華樓)’라 크다랗게 쓰인 편액이 돋보이는 건물로 들어섰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보화루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 휘호로 쓰인 편액으로 은해사의 보물이라고 했다.

사천문을 지나 ‘극락보전(極樂寶殿)’마당으로 들어섰다. 옛날에는 ‘대웅전(大雄殿)’이었다. 극락보전을 마주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6·25전쟁을 휴전했던 1953년 가을, 69년 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은해사에 왔었다.

버스도 없던 시절 추럭을 타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따라 은해사까지 왔다. 지나간 세월이 아득하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 추억에 잠겼으니 감회가 오죽 했겠나.

당시 대웅전(현 극락보전) 앞에서 단체 수학여행 사진도 찍었는데 지금도 그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울렁거리는 감정을 추스르랴 경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아쉬움을 가득 남겨두고 일주문 앞 분수대 광장으로 내려왔다.

점심은 식당에서 마련한 야외 식탁에 둘러앉아 한그릇 뚝딱 먹었다. 모처럼 야외에서 먹은 밥맛이 별미였다. 점심 휴식시간이 끝나자 우리는 임고서원으로 향했다.

포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종(祖宗)으로 존경받는 대유학자다. 고려말 쓰려져가는 왕조를 지키려다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어 순절하였다.

이후 세종은 정몽주를 충신의 반열에 기록함이 옳다 하였고, 중종은 정몽주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바람직하다고 하여 중종 12년에 정몽주의 위패를 모셨다. 한때의 간신(奸臣)에서 절의지사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 명종 8년에 임고서원을 창건하고 명종으로부터 서원 사액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03년에 현 위치로 옮겨져 고종 16년에 존영각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었다.

마지막 답방 코스인 노계문학관에는 오후 3시 반경에 도착했다. 노계 박인로는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며 시서를 독학하여 13세에 대승음(大勝吟)을 지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노계 나이 32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세아 의병장 휘하에서 영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올랐다. 3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38년에 통주사가 되었다가 조라포만호를 제수받아 선정을 베풀다 52세 나이에 20년간의 군무를 마쳤다.

노계의 삶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선비정신을 실천하면서 시대의 아품과 고난을 유학의 도로 삶을 살았으며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선택했다. 노계 시문의 주제는 안빈낙도와 충효사상이다.

그는 당대의 어떤 문인보다도 청빈했고, 어떤 무인보다도 참혹한 전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온몸으로 겪었다.

전란이 끝나고 난 뒤 용감한 무인(武人)이었던 노계는 찢어진 삿갓을 쓰고 낡은 말안장에 걸터앉아 집에 돌아와서는 세상을 등져 한가로운 생을 보냈다.

이때 지은 그의 한시(漢詩) 안분음(安分吟)에 그 시절의 실상 그대로 표현한 글이 있다. ’내 몸에 걸친 옷이 어떤가 하니, 백 군데나 기워서 누더기 옷이로다. 비록 헤어졌을망정 무엇이 걱정이랴?

다만 오래도록 추구할 말을 바랄 뿐이네. 한 그릇밥, 한 족박의 물도 자주 떨어지는데, 그 즐거움은 변하지 않을 뿐이로다. 만약 여우나 노루에 견준다면, 태연히 부끄러움 없을 뿐이로다‘고 했다. 청빈낙도로 일상성을 유지한 노계 선생의 철학을 엇보면서 왠지 부끄럽고 찹찹해 나의 옷깃을 여밀었다.

노계 박인로는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우리나라 근세 문학을 대표하는 고봉(高峰)이다. 노계문학관을 물러났음에도 왠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찌그러진 갓을 쓰고, 다 헤어진 옷자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가사문학에 삶을 바친 대시인의 잔영이 어른거려 발걸음이 무거웠다.

답사 일정을 마친 시간이 오후 5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가졌다. 몇몇 회원들은 넘나드는 가락이 프로급이었다.

박수를 치다보니 새벽부터 설친 피로가 다소 회복하는 것 같았다. 그간 헝클어졌던 마음을 가을바람에 날려보내고 잊을 수 없을 만큼의 즐거움으로 무너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왔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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