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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답사>유교·불교의 문화 그리고 선비의 고장 영주

admin 기자 입력 2022.11.21 10:51 수정 2022.11.21 10:51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 선비촌, 무섬마을 … 선인들 정치·경제·문화 역사 보존

ⓒ N군위신문

↑↑ 수필가 권춘수 박사
대구가축병원 원장
ⓒ N군위신문
수필가 권춘수 박사 문화기행(3)

가을이 깊어가기도 전,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서리가 내릴 사이도 없이 살얼음이 불쑥 찾아온다. 아침저녁으로 겨울 못잖게 제법 쌀쌀하다.

입김이 서리고 눈물 콧물이며 목구멍이 따갑도록 재채기하는 거는 예사다. 그렇다고 겨울옷을 꺼내긴 가을 보기 민망하다.

이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까치 두 마리가 마주 보고 깍 깍 울어댄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온다는 데 공연히 기다려진다.

까치는 거짓말하지 않는 착한 날짐승이다. 군위 문화원에서 2022년 10월 21일(금) 향토 문화유적답사를 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회원들이 시각에 맞춰 속속 모여든다. 삼 년 동안 만나지 못해서인지 얼굴이 낯설어 서먹서먹하다. 만남의 기쁨은 무슨 말을 해야 만족하랴, ‘왔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가족들 다들 잘 있지? 서로가 걱정하고 안부를 물어보며 갈고리 같은 손으로 반갑게 잡는다. 따뜻하고 정에 겨운 사랑의 표시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다.

버스가 정각에 출발한다.
간사가 안전띠 매고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며 자기 이름 위에 서명하라고 한다.
이어서 하루의 일정을 설명한다. 2022 영주 세계 풍기인삼 엑스포를 관람하고,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 선비촌, 무섬마을을 답사하고 오후 6:30분 경 돌아온다고 한다.

답사할 곳을 알림에 실어 줬더라면 그곳에 대한 정보나 기초 지식을 가지고 갈 텐데, 약간 아쉬운 생각이 든다.
엑스포 기간은 2022. 9. 30.~10. 23.(24일간)이다. 이 기간에 23 시군이 하루 동안 자기 고장을 소개하는 날이 있다.

가는 날이 장날? 운 좋은 날? 오늘이 『군위의 날』이다. 10시경에 엑스포 장소에 도착한다. 간사가 행사장을 둘러보고 1시에 공연장으로 오시면 된다고 한다.

소백산을 배경으로 한 출입구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행사장 안에는 붉고 흰 국화꽃 등으로 만든 영주를 상징하는 캐릭터-풍삼이가 이채롭다.

그 앞에서 한 컷했다. 만여 평 넘는 행사장에 주제관, 인삼 홍보관 등 각종 행사장 안내표지가 있다.

주제관에 신제 주세붕(愼齋 周世鵬) 선생의 초상화가 정면에 걸려있다. 선생은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야생삼 씨앗을 풍기 땅에 옮겨 심어 인삼 재배에 성공했다. 행사장을 둘러보고 공연장으로 갔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때로는 실망을 줄 때도 있다. 관람자 가득 메운 공연장 제일 앞 좌석이 텅 비어 있다. 생각 없이 앉았다.

행사 진행 직원이 이 자리는 지정된 좌석입니다. 좌석 뒤를 보니 시장 군수 기관장 이름이 적혀있다. 이런 실수? 황급히 일어나 뒷좌석으로 왔다.

축사는 영주 시장 다음 군위 군수, 영주시 의장 다음 군위군 의장 순으로 한다.
군수의 축사 영주는 인삼, 군위는 대추, 닭백숙 등을 할 때는 인삼과 대추가 들어가야 제맛이 나고 향기가 깊다며 서로 상생하며 발전을 기원한다는 말에 박수갈채가 터진다. 군수와 의장의 늠름한 모습과 패기 넘치는 우렁찬 목소리에 마음이 든든했다.

노래와 6인조 여성 난타 공연 등 다양한 공연을 보고 소수서원 선비촌으로 간다. 선비촌에서 점심을 맛나게 먹고 소수서원으로 간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1년(중종 36) 7월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그 이듬해 8월에 이곳 순흥(順興) 출신 성리학자 안향(安珦) 선생을 배향하는 사당(祠堂)과 후진 양성을 위해 사립학교를 건립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에는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1550년 풍기 군수였던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서 소수서원 이름으로 하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수서원 안에는 사료관, 지락제, 영정각(影幀閣) 경렴정(景濂亭) 등이 있다. 사료관을 지나 안으로 한참 걸어 들어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뿜어대는 피톤치드 향기가 피로를 잊게 한다. 질곡의 세월에 견디다 못한 소나무 세 그루가 한 테 엉켜 땅에 닿을 듯 누워있다.

그 옆에 노거수 향나무 한 그루가 안쓰러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경렴정 옆 수령 5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가는 세월 힘겹게 버티고 서있다.
은행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부른다. 은행 열매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서원과 향교에 은행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은행나무는 유교 사상과 관련된 조선시대의 정신문화를 간직한 귀중한 문화유산이 아닐까 한다.
경렴정과 맞은 편에 취한대가 보인다. 그 사이로 죽계천이 흐르고 있다. 죽계천에 소수서원의 상징적인 경자바위가 있다.

이는 주세붕 군수가 쓴 경(敬)자 바위에 이황 군수가 백운동(白雲洞) 세 글자를 새겨 놓은 바위다.

백운동은 소수서원 본래의 이름이다. 경(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뜻을 의미한다.

죽계천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위를 걷는다. 이름만 들어도 오싹했던 죽계천,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는 시냇물 보고 가슴이 저며온다. 죽계천은 순흥(順興)과 뗄 수 없는 한 많은 사연이 쌓여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1457년 6월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된 뒤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폐되었다.

그해 9월 위리안치됐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되고 순흥부사 이보흠은 참살당했다.

그 후 순흥 안 씨들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 하여 안 씨 일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역사는 이를 1457년 정축년의 변고라 하여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일컫는다.
순흥 안 씨들의 죄 없는 피가 순흥부를 휘감아 흐르는 죽계천을 혈천(血川)으로 만들어 십여 리를 더 흘러가 지금의 영주시 안정면 동춘리까지 이어져 그 핏줄기가 끝났던 이곳을 ‘피끝마을’이라 부른다.

융성했던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폐지되고 작은 고을로 남게 되었다.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이다.

허겁지겁 구름다리를 건너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소백산 기슭 고불고불 한 산골길을 정신없이 달린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주차장에 와서 걸음을 멈춘다. 부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하여 부석사 입구 일주문에 소백산 부석사(小白山 浮石寺)가 아닌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라고 적혀있다.

부석은 ‘뜬 돌’을 의미하는데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할 때 대사를 사랑했던 선묘 낭자가 용으로 변하여 부석사에 숨어있던 도적 떼 500명에게 바위를 날려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가 붕 떠다녔다 하여 부석(浮石)이라 한다.

주차장에서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고 끝이 보이지 않아 계단이 몇 개인지 세어 본다.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정신없이 따라 올라간다. 숨이 막혀 도저히 더 올라갈 수 없다.
작은 누각 마루에 앉아 땀을 훔치며 쉰다. 까딱 잘 못 했으면 세었던 계단 수를 잊을 뻔했다. 사찰의 삼 문 중 첫째 문인 일주 문에 도착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또 오른다.

사천 문을 지나 마지막 문인 불이 문 앞에 들어섰다. 108계단을 올랐다. 국보 제17호 팔각 석등(石燈)이 눈에 들어온다. 108 수자는 108 번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 정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목조 건물이다. 지붕은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되어있다. 배흘림기둥은 중간 부위는 불룩하고 아래위로는 좁아지는 기둥이다.

이것이 무량수전의 자랑거리다.
이를 본 기억이 희미해 한 번 더 보고 싶어 왔건만, 똑똑히 보지 못하고 내려온 것이 ‘낫 놓고 기역 자 모르는’ 까막눈이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행동이라도 빠르면 오죽하랴. 회원들이 무량수전을 보고 버스에 모두 올랐다. 간사는 나를 찾느라 허둥댄다.

나 때문에 버스가 출발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해 본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 걱정했다.
이 와중에도 나를 반겨주는 이가 있어 마음이 놓였다. 말없이 묵묵히 기다려주는 버스다. 빨리 오라며 애타게 부르짖는다.

버스는 나를 보고 안심되었던지 문을 닫고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있는 곳으로 출발한다. 소백산맥 줄기는 어디가 끝인지 찾아볼 수 없다.

거미줄같이 뻗어있는 산기슭 여기저기에 마을이 없는 데가 없다.
버스가 가는 방향을 잃어 길을 헤매다, 가까스로 강 건너 무섬마을이 보이는 수도교까지 왔다. 회원들이 모두 내린다.

다리가 아파 쉬려고 하다 용기를 내어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간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한가운데 와서 허리 펴고 길게 늘어져 있는 외나무다리를 본다. 어릴 때 우리 집 앞에 놓은 작은 섶다리 생각이 떠오른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무섬마을이 고풍을 자랑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국가 민속 문화재 제278호로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水島里)에 있다. 이 마을의 입향시조는 박수 선생이다.

박수 선생은 병자호란 후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만죽재를 건축하여 입향 후, 증손녀와 혼인한 김 대가 들어와 살면서 반남 박씨 가문과 선성 김씨 가문 사람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1934년 큰 홍수로 마을의 절반이 사라지는 시련도 있었지만, 해방 전까지는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60~1970년대에는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가면서 한때는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2000년대에 전통 마을로 지정되면서부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옥의 구조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구조와 크기가 같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있는 해우당(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호), 조선 현종 7년 (1666) 박수가 지은 한옥 만죽재(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 등이 이 마을 자랑거리다.

무섬마을 사람들은 외나무다리가 길고 폭이 좁아서 긴 장대에 의지하여 건넜다고 한다. 과거에는 장마 때마다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서 매년 새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상은 자유로웠다.
조선시대 때 양반과 농민이 함께 공부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본 기지로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아도서숙(亞島書塾:교육기관)이 있었다.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 독립유공자 5명이 된다.
약 300년가량 된 섬계 고택을 둘러보았다.

섬계(剡溪)는 무섬마을의 옛 이름으로 김두한이 택호로 사용하여 오던 것을 사위 이영직이 섬계 고택이라는 서각을 만들어 단 것이 유래이다.

고택은 24칸의 경상북도의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이다. 사랑채, 안채, 마구간, 성주단지, 장독대 등 옛 생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잊힌 선인들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수필가 권춘수 박사
대구가축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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