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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스님을 찾아서(1)

admin 기자 입력 2022.12.04 22:41 수정 2022.12.04 10:41

↑↑ (故) 이윤기 작가
ⓒ N군위신문
저서로는 중단편 소설집 『하얀 헬리콥터』 『나비넥타이 장편소설
『하늘의 문』 『사랑의 종자』 『햇빛과 달빛』 『뿌리와 날개』 등이 있다.
역서로는 『장미의 이름』 『리스인 조르바』 『변신이야기』 등이 있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연구원(종교사)으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같은 대학교 사회과학대학(문화인류학)을 지냈다.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찾기 1- 직선과 곡선으로 동인문학상, 2000년에는 한국번역가상, 대산문힉상(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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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스님을 찾아서(1)



참회하는 마음으로 쓴다. 나 개인의 자괴(自愧) 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살아온 시대의 서글픈 내력이기도 하다.

나는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향에는 우리 형제들의 생가가 있고, 생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조부모와 부모를 모신 선산(先山)이 있다. 선산에는 우리 형제들 묻힐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내 경우는 아직 작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형님들은 아마 거기에 묻힐 것이다. 한 분이 벌써 거기에 묻혀 계신다.

오랜 세월 지나지 않아, 조부모와 부모가 그랬듯이 우리 형제들도 무덤과 이야기로만 남았다가 세월이 자꾸 지나면 그나마 훼멸 될 것이다. 앞질러 말하기 쓸쓸하지만 언필칭 적멸寂滅이 문밖에 와 있다.

마을에 택호를 ‘화북댁’으로 쓰는 집안이 있었다. 그 집 형제들이 우보초등학교를 나와 함께 다녔는데 상급생도 있고 하급생도 있었다. 그들은 외가 고로면 화북리 이야기를 자주 했다.

외가에서 큰일을 치르느라고 며칠씩 다녀올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큰 절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도 내 기억에는 ‘군위군 고로면 화북동’에서 시집온 ‘화북댁’ 및 그 아들들과, 거기 있다는 어마엄하게 큰 별 이야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학교를 차례로 다니면서 삼국사기는 김부식,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 하는 식으로 달달 외기만 했다.

서른 살이 다 된 다음에야 두 사서의 엉성한 번역본을 처음 읽었다. 비록 서양 것이기는 하지만 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참이라 삼국사기 보다 삼국유사가 좋았다. 그래서 삼국유사를 여러 차례 읽었다.

준비되지 않으면 읽어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모양인가? 나는 여러 차례 듣거나 읽었을 텐데도 근 쉰 살이 되어서야, 삼국유사가 씌여진 곳이 내 고향 군위군의 인각사(麟角寺) 라는 것, 그 집 형제들이‘어마어마하게 큰 절’이라고 부르던 절이 바로 인각사라는 것을 알았다.

부끄럽고 억울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고향 터키의 아즈 마르까지 찾아다니던 나에게 그것은 참으로 부끄럽고도 억울한 일이다.

인각사는 내가 다니던 우보초등학교에서 겨우 16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다닐 당시(4학년까지), 40리밖에 안 떨어진 화북에 있다는 절이 인각사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바로 그 절이 일연 스님이 주석하던 절 『삼국유사』의 산실이라는 소리는 더더욱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 고향 인각사의 내력을 안 뒤에도, 서양 신화에 발목이 잡힌 나머지 나는 오래 그 절을 찾아가지 못했다.

카메라를 메고 가야 할지 향촉을 짊어지고 가야 할지 몰라 오래 망설이다. 21세기를 맞고서야 인각사를 찾았다.

대찰을 본 적이 없는 화북 댁의 아들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라고 하던 그 인각사를 처음 보았다.

큰 절은 아니었다.
일주문도 없고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극락전은 작고 초라했다. 극락전 앞에는 일연 스님의 유골을 모신 부도가 서 있었다. 극락전, 강설루, 명부전도 짜임새 없이 흩어져 있었다.

인각사를 찾았던 담사자을은 입을 모아 언제 가봐도 황량하고 찬바람이 돈다든지,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물러준 일연 스님에 대한 이 시대의 대접이 지나치게 소홀하다’라고 쓴다.

이하석님은 심지어 ‘버려진 성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전의 뜻이 그 크기에 있을까, 내가, 지척에 두고도 오래 알아보지 못한 인각사는 큰 절이다.

오늘날의 『삼국유사』를 있게 한 절이라서 큰 절, 크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 문화유산 답사회가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8권) 인각사를 답사하면서 『삼국유사』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삼국유사』는 …… 우리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지리 문학 종교 미술 민속 등 문화 전반에 관한 정보를 캐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금광과도 같은 책이다. 만일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의 고대사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우리는 민족사의 첫머리에서 단군 신화를 지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건국 신화를 갖지 못한 허전함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향가 14수를 잃어야 하리라. 그리하여 그 밖에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신화 전설 설화가 스러져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사유는 물론 꿈까지도 길어 올리던 샘이 말라버릴 것이다. 실로 『삼국유사』 없는 우리의 고대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리라.

『삼국유사』와는 달리,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다. 신라 백제 고구려, 이 3국의 역사를 개국부터 멸망까지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 역사서라서, 설화나 풍습 쪽으로는 전혀 고개가 돌아가 있지 않다.

『삼국유사』는 그보다 140년 뒤인 1285년에 일연 스님이 지은 유사(遺事) 전해지는 책이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고대국가와 3국의 시적(史蹟)을 간략하게 적되, 대부분 신화 전설 설화 시가에 할애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살아온 삶을 결을 엿볼 수 있게 한는 책이 바로 『삼국유사』다.

인각사에 남아 있는 일연 스님 부도비의 정식 명칭은 보각국존비(普角國尊碑)다.
스님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 부도비가 세워질 당대의 학자 민지(閔漬)가 글을 짓고, 진나라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룰 집자(集字) 해서 비문을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벙어리장갑 모양의 파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행히도 옛 탁본의 사본이 비각 안에 걸려 있다.

한 탁본의, 1701년에 씌어진 서문에 따르면, 임진년 전란 때 섬 오랑캐들이 이 비를 보고 왕희지의 참 자취를 여기서 보는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다투어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있다.
이 서문은, 때기 겨울이라 불을 놓고 찍어내다가 왜인들이 비를 쓰러뜨려 깨뜨렸다면서 ‘섬나라 오랑캐들 횡포가 어찌 이리 심한가’ 하고 한탄하고 있다.

이 비문에는 일연스님이 쓴 100여 권의 저서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당대 유생이었던 민지가 『삼국사기』를 의식했거나, 스님의 기록을 심심소일로 희작한 확인될 수 없는 일사유문으로 여겨 고의로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다음과 같이 쓴 데는 까닭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하면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일연 스님은 만년에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뿌리치고 귀향하여 늙으신 어머니를 모셨으며 그 어머니가 가신 뒤에는 인각사를 지키다 입적했다. 그가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281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그가 게송잡지(偈頌雜著) 등 100여 권의 불서를 편찬, 저술한 뒤의 일이다. 일연스님에게 고려의 신화 설화 시가 등의 유사는 사기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 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운 겨울날, 나는 인각사에 한동안 머물다 거게에서 불과 40리 떨어진 내 고향의 어머니 무덤 앞으로 달려가, 허연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군위군 인각사에서 내 어머니 품 안 같은 우리 신화의 세계를 열고자 한다.

<자료제공 : 김성규 전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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