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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장진호 전투의 숨은 영웅들

admin 기자 입력 2022.12.19 23:22 수정 2022.12.19 11:22

↑↑ 황성창 수필가
ⓒ N군위신문
1950년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처음 구상한 사람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거의 끝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김일성의 군대가 흐트러지면서 맥아더는 압록강을 향해 계속 밀어붙였고, 한반도는 곧 통일될 것이라 확신했다. 5성 장군의 맥아더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과 기대가 고조되었고,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의 전세가 우세한 가운데 1950년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으로부터 만km 이상 떨어진 먼 서태평양 상 웨이크섬으로 날아갔다.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중요한 문제를 단도직입으로 꺼냈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는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중국은 한국전에 감히 개입하지 못할 것이고, 설사 그들이 개입하게 되더라도 그들을 물리칠 것”이라 장담했다. 모택동의 군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어서 맥아더는 “김일성은 허망한 희망만 좇고 있다 겨울이 되면 북한군은 섬멸될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처음 언급했던 내용을 재차 물었다. “중국의 태도는 어떨 것 같아요?” “압록강으로 가는 것은 모택동을 자극할 수도 있고 심지어 세계대전도 일으킬 수 있다”. “중국의 개입 위험은 없을 것 같소?”라는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는 “만주에는 30만 명의 중공군이 있다. 그중 5만~6만 명만이 압록강을 건너올 수 있다.” “그렇다면 엄청난 살육이 있게 되겠지요” 맥아더는 압록강이 중공군의 피로 붉게 물들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분석에 트루먼 대통령은 묵시적 동의를 했다. 맥아더의 낙관적인 견해를 트루먼 대통령은 믿고 싶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신념에 찬 의지와 흔들림 없음에 찬탄하고 역사적 만남을 좋은 감정으로 끝내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모택동은 참모들과 한국전 참전 여부를 토의한 결과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중공군의 지휘권을 맡기기로 했다. 이에 펑더화이는 “미군이 압록강에 의해 중국과 분리된 북한을 점령하면 중국 동북부가 위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9일 중공군을 비밀리에 북한으로 진입시켰다. 얼마 지나 모택동은 20만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주은래 외교부장은 주중 인도대사에게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대사는 네루 수상에게 즉시 보고하고, 네루 수상은 미국과 유엔에 중국의 의중을 전달했다. 그러나 트루먼이나 맥아더는 전쟁 개입 경고를 그들의 단순한 엄포로 치부했다. 모택동은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고 생각했고, 미국은 그 메시지를 싹 무시해 버렸다.

1950년 10월 중순 미 해병대와 제10군단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대한해협을 따라 38선 북쪽 원산으로 향했다.

유엔군이 원산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한 북한군은 수중에 기뢰 수천 개를 부설해 두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미군은 특수 함정을 투입하여 지뢰를 발견하고 제거하느라 거의 2주 동안 원산 앞바다에 머물렀다.

원산 상륙이 지연되고 있을 때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해서 지상으로 북진하던 한국군이 이미 원산에 도착하여 적의 저항을 완전히 제압하고 원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무사히 상륙한 미 해병대는 11월 28일 진격 목표인 압록강을 향해 가는 도중 함경남도 유달리 부근 장진호에 도착했다. 미 최강의 해병사단의 진로를 감지한 중공군은 미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함정을 파 놓았다.

미 해병대는 장진호 고산지역에 쳐놓은 12만 중공군의 매복작전에 덜컥 걸려 20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유명한 혹한의 장진호 전투다.

미 해병대 병력 만4000명의 8배나 더 많은 중공군과 대적하기란 매우 불리한 전세였다.
동장군에 “손과 발이 동상에 걸린 채 20여 일 동안 공중 투하로 받은 얼음덩이 같은 전투식량과 크래커, 쿠키, 주스로만 배를 채웠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 2천500명이 전사하고 8천여 명이 동상을 입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모든 전쟁이 다 참혹하지만, 극한의 겨울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냉혹하다. 당시 장진호 고산지역의 기온이 영하 30도에 체감온도가 거의 영하 40~50도 이하로 떨어지는 살인적인 혹한과의 전쟁도 치러야만 했다.

손가락이 금속에 달라붙고 윤활유가 얼어 헬리콥터가 뜨질 못했다. 트럭 엔진이 걸리지 않아 멈춰 섰고, 소총 방아쇠가 얼어붙어 격발도 되지 않으니 총은 있으나 마나다. 총상에서 흐르던 피가 얼어붙어 지혈할 필요도 없었다.

1950년 12월 한겨울, 장진호 전투가 미군 전사에 가장 힘들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미 해병대가 대규모 중공군의 포위를 물리치고 퇴각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겨울에도 원활한 병참 공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진호 인근에 전시용 수송기 이착륙 비행장을 짓고 겨울 솜옷과 충분한 탄약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군수 보급 문제에 의해서 수많은 전투가 아슬아슬하게 승패를 가렸다.

군대는 밥심으로 행군한다는 말이 있다. 군인에게 어떻게 보급품을 원활하게 조달해 줄 것 인가에 대한 명백한 방도가 군사작전의 필수가 아니겠나.

겨울 전쟁은 역사의 거센 물길도 바꾼다는 말이 있다. 한 예로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의 군사 61만 병력의 80% 이상이 살아 돌아가질 못했다.

러시아가 완강히 버티자 나폴레옹은 12월 영하 39도의 강추위를 견디지 못해 퇴각했다. 게다가 먹을 것이 떨어진 나폴레옹 군은 야포를 끄는 말(馬)까지 잡아먹다가 쫓아온 러시아군에 궤멸당했다.

나폴레옹은 “겨울이 우리를 파멸시켰다”라고 장탄식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만큼 겨울 전쟁에는 충분한 군수물자의 조달 여부에 결과가 달라진다.

사학자이며 퓰리처상 수상자인 미국의 바바라 터크먼은 “전쟁은 오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터크먼의 말처럼 김일성의 독선적 권력 욕망의 오판으로 6·25전쟁이란 전쟁의 비참함을 빚어냈지 않았던가.

폐허의 땅에서 오늘의 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2022년 12월의 혹한을 맞닥뜨리면서 72년 전 수많은 사상자를 낸 장진호 전투는 우리가 미국과 미 해병대의 숨은 영웅들에게 갚아야 할 큰 빚이자 부채로 온 국민이 가슴에 새겨 둘 일이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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