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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람들

덕의 근본 ‘효’를 다하는 벽진이씨

admin 기자 입력 2022.12.20 20:23 수정 2022.12.20 08:23

군위군 소보면 산법리에 이영세 선생 부인 ‘현풍곽씨’ 비석 세워
선비 정신 이어받은 이경환 종손, 시조모에 대한 ‘효와 예’ 기려

ⓒ N군위신문

조선후기 사직서참봉을 지낸 이영세(李榮世) 선생의 일휴정 문집(日休亭集)과 반궁일기(泮宮日記) 해석본이 발간된 데 이어 선생의 12대 종손이 지난 10월 12일 효와 예를 기리는 비석을 세워 미담이 되고 있다.

1618년(광해 10)에 태어난 일휴정 이영세 선생은 문신(文臣)으로서 조선후기(164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모암공 이충민(李忠民) 선생의 장남이고, 조선시대 훈련원에 속한 정삼품 벼슬인 훈련원정(訓鍊院正) 권덕시(權德時·안동권씨)의 딸이다.

이영세 선생이 14세에 조선시대 유명한 성리학자로서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찾아갔을 때 옥산이부(玉山二賦)를 명하여 글을 지어 완성했는데, 장현광 선생은 “단지 문사(文詞)로서 일찍이 나아가지 않았을 뿐이지 가히 원대함을 점칠 만하다”고 자랑했다.

1657년(효종 7) 정부에서 재앙으로 구언(求言)을 하자 이영세 선생은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간언을 받아들이고, 기강을 바로잡으며, 사치를 억제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 등 시무(時務)에 적합한 구제 방법을 진언한 바 있다.

1679년(숙종 5)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됐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가 학문에 전념했다. 선생은 어렸을 때 스승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사제 간의 의리란 중대한 것이라며 수개월 동안 빈소를 지키고 돌아왔다고 한다.

1698년(숙종 24) 별세한 이영세 선생은 만 80세까지도 학문을 강론하며 스스로 호학(好學)의 길을 갔고, 선생이 시문(詩文)을 모아 만든 책이 바로 일휴정집(日休亭集)이다.

일휴정집이란 큰 족적을 남긴 이영세 선생의 부인 현풍곽씨(玄風郭氏)는 당시 동지중추부사의 여식(女息)으로 학문에 매진하다 병들은 남편을 10년간 극진히 수발한 열녀이며, 시모(媤母)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달랐다.

덕분에 선생은 건강을 회복해 올곧은 선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고, 부인은 병을 얻어 친정아버지의 부고도 받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끝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영세 선생은 자신의 일휴정집(日休亭集)에서 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기 힘든 효부(孝婦)로서 백가지 덕행을 두루 갖춤에 효와 우애가 특히 뛰어나고 진실로 순수하고 심상이 아름다웠다. 일찍 가정 교육을 받아 시집 와서 남편을 맞이하여서는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고, 시모(媤母)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형제들이 진실로 따랐다.”

이러한 효행과 공경을 이어받은 가문에서 성장한 이영세 선생의 12대 종손 이경환(82·경북 칠곡군 왜관읍 달오리) 씨는 건강이 좋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효(孝)와 예(禮)가 퇴색해 가는 시기에 사비를 들여 약 7년에 걸쳐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조모(始祖母) 현풍곽씨의 비석을 세웠다.

이경환 종손은 형제와 힘을 모아 출입이 통제된 골프장 경계 지점 등에 산재한 시조모 현풍곽씨 등 20기가 넘는 묘소를 족보와 주민 증언을 근거로 힘들게 찾아 경북 군위군 소보면 산법리에 현풍곽씨 비석을 세우고 시조모의 효와 예를 기리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효친사상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태에 보기 드문 효의 모범적 사례를 본다”며 벽진이씨(碧珍李氏)에 대해 칭송하고 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덕목 가운데 효(孝)와 열(烈)이 있는데 효는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덕목이고, 열은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기는 덕목이다.

이경환 종손은 “대대로 덕의 근본인 효와 예의 정신이 가정의 화목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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